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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수와 수비수, 당신은?

<뜻밖의 여정>, 윤여정의 그 한마디

- 제작진 : 선생님이 높은 사람이라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시던데
- 테레사 : 아니다, 저는 서포터다
- 윤여정 : 나는 서포팅하는 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한 거예요. 남을 서포팅 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자신 있고 여유로워야 할 수 있는 거예요. 조연상 타고 인터뷰하면서도 생각했던 것 같아요. 주, 조연이 한국에선 레벨처럼 느껴지거든. 그런데 누구를 서포팅한다는 건 너무너무 대단한 일이죠. 아무나 하는 거 아니에요. 잘나야 서포팅할 수 있어요.

tvN, <뜻밖의 여정> 中




#1.


너는 수비수 같다

방송작가 일을 처음 시작할 때, 아니 아직 작가가 아닌 자료조사 시절에 들은 말이다. 무조건 튀어야 살아남는 작가의 세계에서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내 모습이 안쓰러워 부장님이 던진 말이었지만, 내겐 충격이었고 모멸감이 든 말이다. 4년간의 회사원 생활을 때려치우고(튀면 안 되는 회사원 생활에 익숙한 데다 원래 나의 성향 이건만) 용기 내어 이 세계에 왔지만 내가 놀던 물과 많이 달랐다. 앞다퉈서 자기가 했다 말하고, 내가 제일 잘 안다 아는 척하고, 내가 섭외했다고, 뭐든 내가 다~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천지인 세상에 나는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아... 난 여기 안 어울리는구나’.  흔히 말하는 '작가 무끼'와 거리가 먼 사람이구나.           



#2.

그날 저녁, 집에 와서 남편에게 낮에 들었던 '수비수' 이야기를 속상한 말투로 전했다. 방송가의 세계를 모르는 공대생 남편은 "수비수라고 해도 수비만 하는 건 아니야. 축구에서 미드필더는 공격과 수비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  


방송을 1도 모르는 남편이, 축구를 1도 모르는 나한테 축구를 예로 들어 설명해준 말이, 그날 방송작가 세계에서 까인 나한테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축구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내 귀에는 수비수의 역할도 꽤 중요하다는 말로 들렸으니까.                 




#3.

그 후, “공격수”가 되었냐고 묻는다면, 썩 그렇지는 않다. 천성이 어디 가겠는가. 굳이 분류하자면, 난 여전히 수비수에 가까운 사람이다. 서로 자기가 주인공이라고 치켜세우는, '공격수'가 많은 방송작가 세계에서 난 여전히 드문 유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5년 가까이 밥벌이를 해온 이유는, 먼저 나서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끈기 있게 일을 추진하는 힘을 키웠기 때문일 거다. 하나 더 들자면 '공격수'로 전향하지는 못했어도, 나의 '수비수'체질을 ‘단점’으로만 치부하지 않고 지켜봐 준 선배와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싶다.             




#4. 

공격수냐, 수비수냐! 를 따질 때, 대부분 공격수가 환영받는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앞으로 쭉쭉 나가야 겨우 목표에 닿을까 말까 한 일들이 많은 세상에서 '공격수'가 더 주목받을 수밖에 없지.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는 '주인공'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는 공격수. 그렇게 공격수가 주목받을수록 '수비수'의 자리는 그늘지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수비수'라는 말은 주목받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주인공과 거리가 먼 사람으로 느껴진다.


남을 서포팅 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자신 있고 여유로워야 할 수 있는 거예요.
주, 조연이 한국에선 레벨처럼 느껴지거든요. 그런데 누구를 서포팅한다는 건 너무너무 대단한 일이죠.
아무나 하는 거 아니에요. 잘나야 서포팅할 수 있어요.

    

TV 프로그램 <뜻밖의 여정>에서 윤여정 배우가 던진 한마디에 '수비수'에 대한 나의 편견이 와르르 무너진다. 파친코의 총괄 제작자인 테레사 강이 자신을 '서포터'라고 소개하자, 윤여정은 새로운 정의를 내린다. 서포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 있고 여유로워야 할 수 있는 것이고 너무 대단한 일이라고. 주연과 조연을 레벨처럼 바라보는 것은 잘 못되었다고. '서포팅'이 중요하다는 배우의 이 한마디는 그동안  '수비수'란 말이 '상처적 체질'로 남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서, 얼음장 같던 마음이 스르륵 녹는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것만 같아서.      


   

#5.

내게 비어있는 영역인 '공격수'같은 사람이 부러울 때가 많다. 같이 있으면 나의 수비수인 면 때문에 일이 더뎌지는 건 아닌지 걱정도 고 미안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분명, 수비수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소비되는 면이 있다. 목표만 향해 돌진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많은 것들에 마음이 쓸려서 조금 머뭇거릴 뿐인데, 그걸 이해받지 못할 때가 으니까.


반대로 내 주위엔 불처럼 뜨거운, '공격수'형 친구들이 많다. 내가 갖지 못한 부분이 자석처럼 그들을 끌어당기는지 모르겠지만. 불처럼 뜨거운 그녀들이 새로 낸 길을 묵묵히 걸어가면서 생각한다. 예전엔 상처적 체질로 남았던 ‘수비수’. 굳이  천성을 거스르고 공격수처럼  전환해야 할까. 따라 해 봤자 가랑이만 찢어지는 거  아냐. 그보다 나 스스로 수비수임을 인정하고 그들과 같이  멀리 가는 길이 더  나은 건 아닐까. 윤여정 배우의 말처럼, 그들을 서포팅하는 일이 썩 괜찮은 일이 될지도 모른다. 수비수 옆에 공격수. 공격수 옆에 수비수. 편 가르기보다 서로가 서로를 당기는 좋은 자석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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