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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왜 한예종에 갔을까?

<플레이>, 김정주 ceo의 자소서

“ 저는 늘 콘텐츠에 목말라하며 살아왔습니다. 가끔씩은 왜 내가 이토록 허망한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나....
" 사실 저희 쪽의 작업 방식이란 인터넷을 통해 중간 점검을 하고, 그 결과를 역시 디지털 형태로 받아 확인을 하는 그런 과정이었습니다. 물론 세상이 그렇게 변해간다고 하고 앞으로도 더 많은 일들이 또 그렇게 바뀌어가겠지만, 실제 그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공허함은 제게 늘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플레이>, 김정주 대표의 자소서 중에서


1. 김밥천국의 주문과 스터디 카페의 어느 날   


“ 순두부찌개, 맵지 않게요!  할머니가 드실 거예요. ”


김밥천국에서 밥을 먹는데, 주방으로 주문 넣는 소리가 들린다. 요즘 대세인 키오스크 세계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주문. 물론, 매운맛의 카테고리는 고추의 개수로 구분할 수 있겠지만, '할머니가 드실 것' 같은 애매모호하고 섬세한 매운맛은 키오스크 세계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얼마 전에 겪은 또다른 일. 스터디 카페 이용권 마지막 날, 화장실에 갔다 온 후  퇴실해야지 생각하고 다녀오니 12시 1분. 겨우 1분 지났을 뿐인데 문이 열리지 않는다. 즉, 등록카드의 유효기간은 어제 12시까지. 겨우 1분 지났을 뿐이지만 기계 입장에서 난 등록기간이 끝난 사용자일 뿐. 순간 당황스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화장실 안 들르고 바로 집으로 가는 건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그동안 무인시스템의 장점을 엄청 칭찬해왔건만. 그게 단점이 될 줄이야. 현장엔 관리인이 없고, 짐은 안에 있고, 문은 안 열리고. 지나치게 합리적인 기계 앞에 인간의 애로사항 따위는 의미 없지. 한참을 문밖에 서서 연락처를 찾다가, 다행히 그 시간 들어가는 학생이 있어 겨우 짐을 챙겨 나올 수 있었다. 무인 시스템의 얄짤 없음을 확인하는 순간!  갈수록 사람이 사라지는 디지털 시대의 매운맛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2. 넥슨 김정주 대표의 부고    


“넥슨 대표이사 김정주 별세, 게임업계의 별 지다. "


지난 2월 27일 우리나라 굴지의 게임업체 넥슨 김정주 대표의 부고 기사.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30여 년에 걸쳐 거대 기업을 일군 CEO는 왜 세상을 저버렸을까? 부족한 것 하나 없어 보이는 그는 왜 그랬을까?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창업 환경이 척박한 우리나라에서 재벌이 아닌 벤처가 넥슨 같은 규모의 기업을 일군다는 건 정말 특별한 일이건만, 그에 대한 부고 기사는 빈약하기 그지없다.   


그때 발견한 책이 <플레이>다. <플레이>는 2015년 넥슨 창업 20주년을 기념하며 발간한 책이지만, 넥슨의 창업주 김정주의 성공신화가 아니라 작은 벤처를 글로벌 게임 기업으로 키운 게임 키드들 즉, 넥슨 사람들의 이야기다.  ‘성공’에만 초점 맞추지 않고 기업으로 규모를 키우는 과정 중에 그들이 무엇에 집중하고 어떻게 실패하고, 성공하고, 경쟁하고 갈등하고, 떠나고, 다시 돌아왔는지를 보여준다. 읽다 보면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세운 '넥슨'이란 한 국가의 ‘역사서’처럼 읽힌다.



관심을 가진 또 다른 이유는 비슷한 시기를 거쳐온 사람으로서 갖게 되는 '공감대'에 있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지역에서 대기업을 나와 벤처의 꿈을 가졌던 남편 모습도 그려지고, 벤처 붐을 타고 크고 작은 벤처 기업을 시작한 지인들의 모습이 함께 떠오른다. 지인은 개발한 기술로 성공한 후, 투자가로만 살고 있고, 친한 오빠는 벤처에 실패해 실패의 이유를 학문적으로 알아보다가 창업학 교수가 되었고, 친구 남편은 벤처를 하다 신용불량자가 되었다가 아예 ‘몸살림’으로 직업을 바꾸기도 했으니, 이 책은 벤처 붐을 타고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힌다.   




3. <플레이> 속의  김정주 대표


가장 관심이 간 인물은 김정주 대표. 세상엔 ‘은둔의 경영자’로 알려져 있지만 책에서 묘사된 그는 달랐다. 공대생이지만 운명을 믿고 ‘사람 사귀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고 사무실에 자기 자리가 없는 대표이자, 배낭 하나 달랑 매고 혼자서 해외출장 스케줄을 조정하는 사람이라는 것. 특히, 새로운 기업과 사람 만나는 일을 꺼리지 않은 일화는 놀랍다. 누구든 필요하면 만나고, 놀러 오라고 말하고 그는 넥슨의 고유한 문화인 '알아서 손드는 문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한 기업의 성장사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힌다. 한 기업을 이루기 위해 그곳의 사람들은 어떻게 사귀고 어떻게 헤어지고 어떻게 재회했는가의 과정은 '연애'와 비슷하다. 회사란 결국 누가 남고 누가 떠나느냐의 이야기인 만큼, 기업의 이야기는 어쩌면 사람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김정주 대표가 평생 부러워한 회사는 '디즈니'

“제가 디즈니가 제일 부러운 건 디즈니는 아이들을 쥐어짜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이들과 부모들이 스스로 돈을 싸 들고 와서 한참 줄 서서 기다리며 디즈니의 콘텐츠들을 즐기잖아요.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디즈니한테 돈을 뜯기죠. 넥슨은 아직 멀었어요...... 우리 콘텐츠는 재미는 있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불량식품 같은 재미인 거죠.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고."


김정주 대표가 평생 부러워한 회사는 디즈니였다. 반전이다. 게임회사 대표가 가진 게임철학치고는 남달랐던 것 같다. 게임을 많이  팔아 이익을 남기는 것을 넘어 하나의 '콘텐츠'로 생각하고, 이왕 같은 재미라면 '자발적인 즐거움'을 누릴 준비가 되어있는 '디즈니'를 모델로 생각한 것이다. 그는 게임을 그저 가벼운 재미 정도가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콘텐츠로, 자발적으로 즐거움을 찾아가는 콘텐츠로 생각하며 좀 더 큰 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나이 40에 왜 한예종에 갔을까?   

또 하나의 궁금증은 신문기사를 통해 알게 된 꽤 독특한 이력이다.  나이 40에 한예종 대학원에 입학했다는 사실이다. '왜 IT 기업의 경영자는 비즈니스 스쿨이 아닌 한예종 대학원을 갔을까'. 책에는 당시 그가 썼다는,  '자기소개서'가 나온다.


저는 늘 콘텐츠에 목말라하며 살아왔습니다. 가끔씩은 왜 내가 이토록 허망한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좀 벗어나 보려고 하다가도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또 잔뜩 주문해둔 책 속에서 허덕이고 있거나, 내려받아 둔 드라마에 빠져 집을 못 나가고 있거나, 일주일 여행 스케줄을 온통 공연으로 가득 채워놓고 집안 식구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공연장 사람들의 그 생생함은 제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져다주었습니다.”


“ 사실 저희 쪽의 작업 방식이란 이메일로 뭔가를 이야기하면, 인터넷을 통해 중간 점검을 하고, 그 결과를 역시 디지털 형태로 받아 확인을 하는 그런 과정이었습니다. 물론 세상이 그렇게 변해간다고 하고 앞으로도 더 많은 일들이 또 그렇게 바뀌어가겠지만, 실제 그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공허함은 제게 늘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15년간 게임이라는 장르만을 하면서, 물론 앞으로도 20년, 30년 어떻게든 그 관계가 이어지기는 하겠지만, 그리고 그 중심에 사람 냄새가 물씬 묻어나는 매우 아날로그적인 공연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좀 다른 형태의 콘텐츠도 찾아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디지털 세상의 공허함은 숙제?!  

그렇게 2007년,그는 나이 40한예종 대학원에 입학했단다. 이런 진심을 담은 자기소개서를 보고 어떻게 안 뽑을 수 있겠는가! 자소서를 보며 그가 왜 늦은 나이에 예술대학원에 다니게 되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것만 같았다. 편리하고 익숙한 디지털 세상, 그 세계를 부추기는 세상에 살면서도 마음 한켠으로는 사람들이 느낄 '공허함'을 숙제로 생각했나 보다. 풀지 못한 숙제 앞에서 그는, 사람 냄새나는 아날로그적인 '공연'을 하나의 해법으로 생각했던 건 아닐까. 그의 메시지는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다. 곧 나에게도 닥칠 일 같아서.


디지털 시대의 공허함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며, 인간 냄새나는 아날로그적인 콘텐츠를 생각한 넥슨의 창업자 김정주. 그를 단순히 '게임 업계의 별'로만 기억하기는 아까운 인물이다. 물론 돈슨 등 그를 부정적으로 본 시선들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누군가는 맨땅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한 그의 발자취와 정신만은  따라가봤으면 싶다.그는 어떤 마음으로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만들어 갔을까.  황무지에 길을 내며, 그의 자리에 올라 다음 사람들을 위해.  겁 없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그의 이야기가 좀 더 입체적으로 그려졌으면 좋겠다. 누군가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질 이야기가 될 테니까.


한편,  책을 읽는 내내 그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변화하는 세상에 앞장서면서 모두에게 욕받이가 될 (“돈슨” 같은) 수많은 결정을 내리면서 혼자 감당하기 어려웠을 무게와 공허함. 결국,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대표라는 자리는 참 외로웠겠구나. 그래서 그는 스스로 세상을 떠났구나 싶어진다.





4. 나의 아날로그 노동 시대가 끝나가는 이때


얼마 전, 다이소에 갔더니 계산대가 바뀌었다. 계산대 앞에 긴 줄을 서야 했던 곳에 무인 자율 계산대가 설치되었고 문제가 있을 때만 '사람'이 달려온다. 편하지만 사람이 사라지는 풍경.

상상을 넘어서는  디지털 세상으로의 빠른 변화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있음을 실감한다. 처음 방송국 생활할 때가 떠올랐다. 2000년대는 넷스케이프와 익스플로러와 야후 등 다양한 인터넷 연결 세상이 있었다. 그전에는 자료를 찾으려면 보도국 컴퓨터에서 카인즈로만 찾아야 했는데.  이제는 내 방 컴퓨터로 세상의 온갖 자료를 찾는다. 그 변화를 따져보니 정말 순삭의 시간이다.



나의 아날로그적 노동의 시대가 끝나갈 즈음, 내가 겪는 변화가 이 정도인데, 우리 아이는 키오스크나 인공지능과 경쟁하게 될지 모르겠다. 점차 사람이 사라지는 '무인 노동'이 판을 치는 디지털 시대. 사람들은 어디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김정주 대표의 고민처럼 디지털 시대의 허망함을 어디서,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과연, 김밥천국의 사람 냄새나는 주문서처럼, '안 맵게 할머니가 드실 것'이란 주문은 계속 가능할까? 아마도 사람 냄새나는 서비스는 한껏 돈을 주고 사야 하는 비싼 서비스가 될 것 같은 슬픈 예감이다. 디지털 세상이 가속화될수록 찾아드는 공허함. 여기서 벗어나려면,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아날로그적인 것, 한 가지쯤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닐지, 넥슨의 역사를 다룬 <플레이>를 읽으며 드는 생각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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