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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isKurts Oct 04. 2021

인생 첫 잔

산바하라 주점과 인생 첫 잔의 대화

주르르륵. 주르르르륵


유달리 비가 많이 내리는 하루. 추적추적 걷고 있다. 쓰다 부러진 우산을 터덜터덜 들고 넋이 나간 채 걷는다. 퍼부운 비 때문에 더 이상 걸을 힘도 없어서인지 얼굴은 잿빛이고 지쳐있는 기색이 역력하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십여 년은 되었을 법한 일본 정통 선술집 '신바하라'가 눈에 띄었다. 2층 테라스에는 덩굴까지 걸려있고 곳곳에 조명이 담겨 신비스러운 느낌이 있는 곳이었지만 폭우가 쏟아지는 밤에는 마치 무더기의 잡초더미 마냥 괴상적인 느낌이다. 사람마저 걷지 않는 골목길 안쪽의 가게 앞 골목길은 오싹한 기분마저 들 정도다.


툭툭


본능적으로 발길이 닫는다. 이상한 느낌에 끌려 손을 뻗게 만들었다. 바람에 짓이겨진 찢어진 우산을 쓰레기 더미 가운데 대충 던져버리고 머리카락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대충 두어 번 털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두어 차례 옷을 털고 주황빛의 신비로운 조명을 드러내는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하는 나무 경첩 소리가 인사하듯 반겨주고 고개를 들이밀며 잔뜩 풀린 눈으로 좌우를 살폈다.


'아무도 없나...'


나지막이 읊조리며 문을 여는 순간 기다란 메인테이블 끝 커튼 안쪽에서 한 남성이 나오며 중저음의 목소리로 반겨줬다. 얼마쯤일까, 키는 190의 덩치도 우람한 남성. 그야말로 거대한 남자라는 표현이 맞지 싶다. 심지어 수염까지 잔뜩 길러낸 그의 모습은 위압감마저 뿜어내기도 한다. 그의 날카롭고 무거운 이미자와는 반대로 깔끔하게 차려입은 정장 슈트는 고즈넉한 내부 분위기가 맞닿아 우아하고 고급스러움을 연출했다.


"어서 오시오. 이쪽 자리에 앉으시오."


고개를 끄덕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다. 오랜 시간 비를 맞은 탓인지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온몸이 오싹하고 떨림이 전해졌다. 부르르 살짝 떠는 모습을 보던 남자는 말없이 바라보다 수건 하나를 건네줬다. '이쪽으로 앉으시고, 여기가 조금 따뜻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질 거요.'라는 말과 함께 작은 화로가 피어있는 곳 근처의 자리로 안내하며 투명 글라스에 담긴 따뜻한 카모마일 티 한잔을 건넸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래도 차보다는 보드카 한잔이 더 필요합니다."


속이 들끓었다. 혼미할 정도로 뜨겁고 달궈진 보드카 한잔이 더 간절히 필요했다. 가슴이 뜨겁고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지금은, 술 한 모금이 간절했다.











초면이었음에도 선뜻 베풀어준 호의에 감사해하며 보드카 한잔을 입에 털어버렸다. 뜨겁고 강렬한 기운이 목덜미를 타고 온몸 구석구석을 채워버렸다. 감기 기운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아찔함이 온몸을 휘감기 시작할 무렵 말없이 바라보던 남자가 입을 뗐다.


"그래, 그래서 무엇이 그리 고민 이시오?"


3년을 부단히 노력해오던 사업이 무너져버렸다. 제대로 준비도 되지 않은 채 막연하게 잘될 것이라 믿으며 도전했던 장사의 첫 시작부터 꼬여 있었다. 사전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지인의 말만 믿고 투자했던 음식점은 주변 입지와 상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들어갔던 것이 화근이었다. 탁 트인 곳에 있는 위치였고 신도시 인근의 장소였기에 큰 문제는 없으리라 믿었지만 유동인구가 너무 적었다.


음식점을 하면서 음식에 대한 공부나 준비 없이 그저 열정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었는데 헛된 꿈에 부풀려 있었다. 고객의 맛을 선점해서 입맛을 맞춘 음식을 준비하기보다는 내가 만들고 싶은 음식을 준비하기에 급급했다. 완성도 있는 음식을 준비하기보다 당장 눈앞에 놓여 있는 일을 쳐내기 바빴다. 깊이 있는 맛의 연구를 담기보다는 그저 보이는 모습 자체만 신경 썼다.


단 한 번의 눈속임은 꾀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지속적이지 못함을 깨달은 것은 너무나 긴 시간이 지난 뒤였다. 무려 3억이라는 돈과 3년이라는 시간을 쓰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젠 더 이상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가게는 파리가 날리기 시작했고 화목했던 가정은 잦은 불화가 생겼다. 더 큰돈과 더 많은 야망을 가지고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오히려 번듯한 직장 생활을 하며 한 달 한 달 걱정 없이 살았던 때에 비해 가혹할 정도로 고통스럽고 커다란 시련을 남겨주었다.


"이곳은 어떻다고 생각하시오?"


"좋습니다. 좋군요, 고급스럽고 우아하고 손님들이 좋아할 것 같습니다."


"허허, 그렇게 보이시오? 이곳은 특별한 사람들만 방문할 수 있는 곳이지 특별함이 없는 사람은 찾을 수 없는 곳이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주인장의 말에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알 수 없는 그의 태도에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내 뭔가 이해가 된 것처럼 고개가 끄덕여졌다. 술맛이 좋았다. 짙은 술 한잔과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왜일까,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족과의 관계도, 사회적인 관계도 더 이상 돌릴 수 없는 인생인데. 아니면 이젠 정말 한강이라도 가서 떨어져야 할까요."


"글쎄, 그건 마음먹기 달렸지. 누군가는 10억의 빚을 가지고도 견디고 이겨내고 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1천만 원의 빚만 가지고도 버틸 수 없는 고통 때문에 하루하루를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별 시답잖은 얘기를 하던 통에 담배 한 대를 꺼내서 손가락에 끼고 피워도 되겠냐는 제스처를 취했다. 주인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불을 붙이고 크게 한 모금 빨아들이며 '후우-'하고 온갖 근심 걱정을 담아 내뱉어버렸다. 가게 내부가 자욱한 그림자로 퍼져 들어갔고 순식간에 공기가 탁해졌다.


"인생은 살다 보면 그래, 우울할 때도 슬플 때도 그리고 기쁠 때도 있다네. 인생은 술잔과도 같지. 쓰디쓴 한잔의 목 넘김에 다시 한번 한 번 일어서기도 하거든. 고통스럽다고? 그게 인생이야. 인생이 쉬우면 못난 놈은 왜 있겠냐. 어려운 게 맞아, 그런데 자네 인생이 평생 보잘것없으리란 보장은 없다네."


피식. 흘러나오는 웃음에, 어처구니없는 격려에 웃음이 나고 실소를 터트렸다. 참, 편하게도 얘기한다 싶다. 그런데 쓸데없는 저 위안이 참 쓸데없게 지금 위로가 많이 되는 기분이다. 왜일까, 무엇을 그토록 애처롭게 기다렸고 간절하게 기다렸던 것일까.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끓던 가운데 고개를 끄덕였다.










끼익 끼익.


낡디 낡은 오래된 나무 문 경첩 소리가 '조심히 가세요.'라고 말하는 듯 친절하게 들렸다. 마음이 괜스레 편해진 탓에 마음도, 얼굴도 한결 편해지고 가벼워진 느낌이다. 보드카 한잔이 이토록 좋았던 것인지 괜히 입맛을 한 번 더 다셨다.


"이곳엔 다시 올 일 없었으면 좋겠구먼."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문을 열고 나가려다 멈칫했다. 그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이름이라도 묻고 싶습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로이스트 히터. 산바하라 주점의 주인장이지."








* 가제 산바하라 주점에 대한 이야기를 작성해서 업로드 하고자 합니다.

일반 에세이도 좋아하고, 여러가지 글쓰는 것을 좋아하는데 긴 호흡으로 써볼까 합니다.

그동안은 일반 단편 한 편 한 편 에세이만 쓰곤 했었는데 저도 어떤 흐름으로 갈지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도됩니다. 아직은 구독자도 적고 많은 분들이 관심갖는 글을 쓰고 있지 못하지만, 누군가에겐 흥미롭고도 영감이 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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