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된 직장에서 얻는 자아실현까지 겪어야할 불안과 외로움은 얼만큼일까
가을이 시작되는 즈음, 바람이 차가워진다 느껴지면 학교 비정규직 선생인 나는 서러워졌다. 추워진다는 건, 10월 말 임용고시 접수일이 다가온다는 뜻이고 11월 말 토요일은 임용고시 치는 날이기 때문이다. 바쁜 학교 일에 내가 비정규직임을 잊고 있다가 이를 확인시켜주는 날들이 많아짐을 의미한다. 기간제 교사는 학년 말이 되면 학교와 다음 년도에 재계약을 할 것인지, 혹은 학교에서 나가달라고 말을 건넬지 모르기 때문에 서서히 마음의 준비를 한다. 임용시험을 준비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서러워지기 시작하는 시즌이다.
긴 기간제 교사 시절 동안 교사가 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임용고시 합격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고 결국 공부만이 답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사립학교의 이사장과 어떻게라도 인연을 만들거나 아니면 적당한 판로를 뚫어 몇 억원을 들이밀면 정교사가 될 수도 있다던데 나는 사립학교와 그 어떤 연도 없었고 몇 억도 없었다.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공립 임용고시 합격 뿐이었는데 이 놈의 시험이란 게 공부를 해도 합격을 보장하는 시험이 아니라서 공부하면서도 늘 불안한 마음, 그것이 가장 힘들었다. 왜냐하면 수학이 너무 어려웠고 그래서 시험에 대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험을 붙들고 있자니, 내가 합격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은 책을 보는 매순간 나를 힘들게 했다.
전공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수학의 경우, 전공 과목이 9개 정도인데 그 모든 교과가 어렵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상대적으로 내용 이해의 어려움보다 방대한 양으로 승부를 보는 교과도 있다) 고등학교 때 수학을 좋아했고 나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대학교 수학은 완전히 달랐다. 대학입학부터 자존감이 뚝뚝 떨어지기도 했다. 다른 동기생들은 어찌나 잘하는지 생전 처음 듣는 이론을 교수님의 간단한 설명만 듣고도 이해하고 그를 확장하여 사고하며 서로 질문하고 대화하는 것을 들으면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대학 4학년 때 올인하여 최선을 다해 공부했지만 그건 이해 위주의 공부가 아니었고 그저 수학을 암기할 뿐이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이건 너무 어렵고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이걸 합격할 수 있을까. 겉핡기 식으로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시험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이런 생각은 스스로를 우울하게 한다. 마치 저 사람과 결혼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품은 상태로 만나는 연인과는 곧 헤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임용고시는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불합격은 자연스럽게 임용 재수의 길이 아니라 기간제 교사의 길로 이끌었다. 해결이 아닌 단순한 회피이자 미봉책이었다.
서른이 넘어서야 결국 공부만이 길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다시 수험생을 선택했다. 공부를 하면서도 공부가 어려워 마음은 늘 불안하고 이걸 공부하는 것이 맞는지 내가 합격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냥 평생 기간제 교사로 살아야하나 복잡한 마음에 참 많이도 울었더랬다. 생각해보면 서러울 것도 없다. 수학을 잘하는 사람이 합격하는 시험이다. 당연한 이치이다. 못하면 불합격인 것이다. 이러한 불안한 마음은 공부에 올인하기 보다 기간제 교사 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수험생의 삶을 살도록 했다. 일종의 보험처럼 말이다. 그러기를 5년하니 삶의 질도 떨어지고 공부에도 효과적이지 않은 것 같아 이건 아니다 싶어 모든 일을 접고 공부만 했고 결국 실력이란 것이 향상되어 모든 운이 닿아 나도 합격이란 것을 하게 되었다.
공부를 하면서 공부가 되고 있고 실력이 향상되는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해도 어렵다고 느껴졌으나 공부로 인한 힘듦보다 더 아픈 것은 외로움이었다. 이런 불안한 감정을 함께 공유하고 이해해줄 사람이 없었다. 이런 구차하고 자존심 상하는 감정을 편하게 말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은 한없이 작아져갔고 우울했고 외로웠다. 실제로 많은 고시생들은 카페를 통해 생활 스터디를 모집에 함께 밥을 먹고 쉬는 시간에 수다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해 힘들 얻기도 한다. 임용고시 수석 합격하여 기간제 교사를 해본 적 없고 육아까지 도맡아 아내의 고시 생활을 적극 지원하고 있는 남편에게 힘들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한 번 씩 왜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건지, 너무 힘들어서 못살겠다는 짜증이 치솟아 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수험생활 몇 년을 보냈다. 잊지못할 수험 생활.
도저히 이해못할 것같은 이론도 몇 년에 걸쳐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질문하고 반복하면 알게 되는 것이 있었다. 물론 그래도 끝까지 모르는 것도 아주 많다. 그런데 사람이 거의 목숨걸고 무엇을 하면 자신이 원하는 바에 조금은 가까워지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것. 포기하면 그냥 끝이다. 얻을 수 없다. 포기하지 않고 아무리 오래 걸려도 그냥 시도하고 노력하면 조금은 얻어지는 걸까. 그 과정에서 힘들었던 것들을 보상해줄만큼 말이다. 열심히 하면 이룰 수 있다는 고리타분한 말은 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객관적으로 측정가능한 똑같은 양의 고통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느끼는 힘듦의 정도는 다를 것이다. 이는 목표의 달성이 개인에게 주는 가치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나의 경우, 주변의 인정이 나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이 컸고 나 스스로도 비정규직임이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십년넘게 수험생의 삶을 선택할 수 있었다. 기간제 교사로서 부당하다고 느낀 적도 많았지만 남들 시선에 개의치 않고 나만 괜찮았다면 퇴근 이후 공부대신 여유를 즐기며 비정규직 교사로 오래 근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정된 직업으로 인해 느끼는 자아실현의 가치가 큰 사람이라서 계속된 불합격에도 시도했다. 그러나 방향을 틀어 또다른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여전히 삶에 정답은 없으며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 생각하고 갈 뿐이다. 하루를 열심히, 즐겁게 살아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