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_ 스파이크 존즈, 2013
상해로의 휴가를 결정할 때 특별히 영화를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길지 않은 휴가 기간 동안 가볍게 다녀올 만한 선택지를 고르다 마침 괜찮은 항공권을 발견해 내린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그런데 여행 계획을 세우다 문득 영화 그녀(her)의 촬영지가 상해 푸동(浦東)지구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이참에 영화 속에서 마냥 비현실적으로만 보이던 미래 도시의 풍경을 직접 눈에 담아볼 수 있겠다 싶었다.
주인공 테오도르가 출퇴근하던 길의 촬영 장소인 루자쭈이(陆家嘴)역에 내리니 다양한 형태의 고층 빌딩들로 이루어진 스카이라인과, 에스컬레이터가 생소한 거대한 육교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감독이 왜 이곳을 미래 도시의 촬영지로 점 찍었는지를 바로 이해할 수 있을만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맑은 날씨 탓에 영화의 분위기가 바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육교에 올라 미리 준비해 간 영화 스틸컷 속의 지점들을 찾아 나서 보기로 했다.
테오도르의 퇴근길 장면에 나온 거대한 빌딩들은 대부분 실재하는 것들이었는데, 빌딩들 사이로 멀리 보이는 흐릿한 건물들은 그래픽으로 채운 듯했다. 맨 왼쪽의 둥근 옥상의 건물과 맨 오른쪽의 각진 건물을 기준 삼아 사진을 찍고 크롭핑해보았다. 조금 어둑해질 때쯤 갔으면 더 좋았으련만. 게다가 흐린 날이 많다던 상해의 날씨는 왠지 여행 내내 맑기만 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영화와는 별개로 건물들의 디테일이 선명한 '쨍한' 사진을 담을 수 있다는 게 좋긴 했다. (영화의 색감과 분위기에 맞춰 보정을 해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어색해서 사진은 원본으로)
조금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보면 이렇다. 이 각도에서는 영화 촬영 당시엔 없었던 새로 올라가고 있는 빌딩도 하나 보인다. 맑은 날씨 때문인지 육교 위의 사람들은 거의 관광객들 뿐이었고 현지인들은 주로 육교 아래로 다니고 있었다.
가장 찾기 힘들었던 에스컬레이터. 육교에 워낙 많은 에스컬레이터가 있었던 데다, 위의 스틸에서 뒤로 보이는 빌딩도 별다른 특징이 있는 건물이 아니어서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감독이 특히 이곳에서 영화를 촬영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도로 위를 덮은 거대한 고가 육교 덕에,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멀리 찍더라도 화면에 잡히는 도로 위 자동차들의 모습을 최소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만큼이나 발달한 대도시 한가운데서 넓은 보도 위에 보행자들만 보이는 풍경은 과연 생소했다. 흔히 미래의 모습이라고 하면 고도로 발달한 이동 수단을 먼저 떠올리기 쉬운데 오히려 차도가 없는 대도시의 모습을 담고자 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가끔 난 그런 생각을 해요. 난 앞으로 내가 느낄 감정을 벌써 다 경험해버린 게 아닐까,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새로운 느낌을 느낄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
Sometimes I think I have felt everything I'm ever gonna feel. And from here on out, I'm not gonna feel anything new.
위 스틸컷은 테오도르가 사만다와 다투고 난 뒤 거리에서 빌딩 숲을 올려다보는 장면이다. 이 사진도 미리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사진들 중에 우연히 비슷한 구도의 것이 있길래 올려본다. 아마도 상하이 국제금융센터(上海環球金融中心, SWFC) 전망대에서 야경을 감상하고 내려와서 찍었던 것 같다. 촬영 지점이 전혀 달라서 빌딩들의 순서에 차이가 있다. 세 빌딩은 아래 사진을 기준으로 왼쪽부터 SWFC(100층), 진 마오 타워(金茂大厦, 88층), 상하이 타워(上海中心大厦, 128층)다. 특히 올해 완공된 상하이 타워는 영화 스틸 속에선 아직 공사 중이다.
푸동 지구에서 찾은 영화 속 장소들은 여기까지. 다음은 여행 마지막 날 찾았던 주메이라 히말라야 센터다.
외관부터 독특한 이 건물에서 영화가 촬영되었다는 사실은 한 블로그(http://blog.naver.com/trvltormtis/220362431708)를 통해 접하게 되었다. 마침 이곳이 푸동 공항으로 가는 공항철도가 연결된 룽양루(龙阳路)역 바로 옆의 화무루(花木路)역에 있다고 하여, 아무런 일정이 없던 마지막 날 오전 공항으로 가는 길에 들러보기로 했다.
이곳은 영화에서 테오도르가 처음 OS1을 접하는 장면의 촬영지이다. 당연히 세트장일 것이라 생각했던 이 장소가 실재하는 곳이었다니...
푸동 지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미래적인 느낌이다. 동굴을 연상시키는 불규칙한 곡선의 기둥들이 신비로웠다. 이곳은 호텔과 쇼핑몰, 전시관 등이 함께 있는 복합 건물이었는데, 안타깝게도 1층에서 유료 전시가 진행되고 있어서 영화가 촬영된 지점들에 직접 가보진 못했다. (관심 가는 전시였다면 입장을 고려해보았을 텐데 하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로봇 만화 기획전이었다. 어쩐지 역에서부터 엄마 손을 잡고 온 애들이 많더라니...)
이곳에서 짧은 휴가의 일정을 마무리해야 했다. 영화에서 그려진 삭막한 미래의 모습보다는 정겨운 여행이었던 것 같아 다행이다. 언젠가부터 '미래'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썩 좋게만 다가오지는 않게 되었다. 나는 지금 키보드로 이 글을 쓰고 있고 누군가는 아직 손으로 글을 쓰고 있을 테지만 언젠가는 다들 영화에서처럼 '입으로' 글을 쓰게 될까? 그런 미래는 조금은 천천히 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 난 그 책을 아주 천천히 읽고 있어요. 그래서 단어와 단어 사이가 멀어져 그 공간이 무한에 가까운 그런 상태예요... 그 단어들 사이의 무한한 공간에서 지금 나 자신을 찾았어요... 나는 당신의 책 안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요.
But I'm reading it slowly now. So the words are really far apart and the spaces between the words are almost infinite... but it's in this endless space between the words that I'm finding myself now... I can't live your book any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