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 _ 이용주, 2012
영화 건축학개론은 그 해 보았던 가장 마음에 드는 한국영화 중 한 편이었다. 일방적인 남성 중심의 판타지로 점철되어 있다는 지적에 십분 동의하면서도, 승민의 크고 작은 실수들에 어쩔 수 없이 오버랩되는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보다 더) 찌질했던 과거의 나와 마주하게 해 준 이 영화에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어떤 집에서 살 거냐면,
2층 집에서 살 거야.
창도 많고, 마당도 있어...
스무 살 서연이 꿈꾸던 집은 십 수년이 지난 후 고향집의 증축을 통해 실현된다. 내용 전개에 따라 설계가 거듭 변화하며 완성되어가는 이 건축물은 영화의 서사가 고스란히 담긴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신축이 아닌 '증축'은 지난 과거에 대한 회고와 반성이라는 영화의 주제를 함축한다.
친구들과 갑자기 떠나게 된 제주 여행 중에 바득바득 우겨 굳이 외진 곳에 위치한 '서연의 집'에 들렀다. 결과적으로 다른 친구들도 이 공간을 썩 마음에 들어해 다행이었다.
표지판에 적혀있듯이 이곳은 '카페 서연의 집'이다. 단순한 전시관이 아닌 카페로 활용한다는 것이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다. 건물은 영화 촬영 이후에 다시 지어진 것인데 촬영 당시의 서연의 집은 제작비 관계상 모델하우스 같은 가건물이었다고 한다(영화가 이렇게 잘될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정식으로 지었을 텐데, 건축학개론의 큰 성공은 당시 충무로에서도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고). 다시 지어진 카페 건물은 영화에서 보았던 서연의 집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차이가 있다. 일단 크기가 전체적으로 작아진 듯한데, 결정적으로 옛집의 기와 지붕이 사라진 점이 아쉽다.
마당에 들어서면 어린 서연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 수돗가를 볼 수 있다. 다만 이것도 다시 재현해놓은 것인지, 발자국 모양이 영화에서와는 조금 다르다. 여기에 금붕어를 풀어놓고 키우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일 것 같다. 그래도 영화의 아련한 분위기는 물씬 묻어 난다.
영화에서 깊은 인상을 주었던 탁 트인 창. 많은 이들이 아마 이 풍경을 직접 눈으로 보고자 이곳을 찾았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물론 마찬가지였는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다. 영화에서는 없던 전깃줄(아마 CG로 지운 듯)과 정원에 새로 심어진 나무 등이 보여서 분위기가 약간은 달라진 듯도 했지만, 여전히 나름대로의 멋스러움이 느껴졌다. 카페 내부에 사람들이 많아 창이 잘 보이는 자리를 겨우 잡아서 앉을 수 있었는데, 그냥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참 편안해졌다(굳이 사진에 담지 않은 내부의 모습은 그냥 평범한 카페를 생각하면 된다. 전체적으로 사진 숫자가 적은 이유는 손님들이 많아 그들이 잡히지 않도록 사진을 찍기가 어려웠기 때문...).
영화에서도 창 쪽 방향으로 찍은 인물들은 역광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는데, 실제로는 더욱 그렇다. 셀카는 그럭저럭 찍을만했지만 영화에서처럼 넓게 배경이 들어오도록 사진을 찍으면 인물은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정도. 나와 친구들도 열심히 자세를 잡고 사진을 찍어보았지만 역시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카페 곳곳엔 스틸컷과 대사들, 사인 포스터, 소품 등이 갤러리처럼 전시되어 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영화에서 스무 살 승민이 서연에게 선물해주려고 만들었던 건축 모형. 여담이지만 영화를 연출한 이용주 감독은 실제 건축학도 출신이고, 영화 속 서연의 집과 지금의 '카페 서연의 집' 건물은 모두 그의 대학 동기인 구승회 건축가의 작품이라고 한다. 실제로도 두 분이 건물 설계와 건축 과정 내내 싸우셨다고...
2층의 잔디밭은 영화에서와 차이가 가장 크게 느껴지는 공간이다. 일단 면적이 많이 줄었고, 펜스도 생겼고, 무엇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옛집의 지붕이 없어진 것이 아쉬웠다. 다만 잔디밭 한 켠에서 경치를 감상하며 커피를 즐길 수 있도록 마련된 썬베드 형태의 좌석들은 참 좋아 보였다(역시 손님들이 있어서 사진은 찍지 못했다). 실제적으로 잔디 관리 같은 부분을 생각해보면, 영화에서처럼 보통 가정집에 이런 공간을 만든다는 건 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물론 여기에서도 경치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힌다.
영화의 성공 덕에 다시 지어지고 문을 열 수 있었던 이곳은 영화 속 장소 그 자체라기보다는 영화의 분위기를 반쯤 간직한 새로운 공간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주말이라 그런지 대부분의 손님들이 관광객들이었는데 일찍이 좋은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보거나 할 일을 하고 있으신 분들 중에는 제주민 분들도 꽤 있는 것 같았다. 좁은 시골 골목을 굽이굽이 들어가야 찾을 수 있어서 접근성이 썩 좋진 않지만, 영화를 떠나서라도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분위기를 즐기러 다음에도 꼭 들르고픈 곳이다. 이야기에 공간과 기억을 효과적으로 녹여냈던 영화는 오래 기억될만한 영화 같은 공간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