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지만 28~30도를 넘나드는 후덥지근한 날씨.
1주일 전부터 와서 집을 찾아다니면서 버스는 익숙해졌다, 손을 휘젓지 않으면 정류장에 서지 않는 문화도, 내리기 직전까지는 하차 카드를 찍을 수도 없다는 것도, 하차 바로 직전에 2층에서 내려오는 모습도.
처음엔 조금 불안했지만 지나고 보니 다 되더라. 한국에서는 왜 이 모든 것을 다 미리미리 빨리빨리 하려고 했던 걸까.
그렇지만 첫 출근은 지각했다
(?)
약간 들뜬 마음으로 10분 일찍 나왔다가 버스를 반대로 타는 바람에 택시 타고 10분 늦게 도착한 것이다.
다행히 OT 기간이어서 나 같은 사람들을 다 고려했는지 15분의 여유 시간을 줬더라.
회사는 다국적 직원들이 일하는 만큼 다양성을 존중해 주는 듯했다.
점심 도시락을 미리 주문하면서 한 명 한 명에게 개인 취향 및 종교를 물어봤고,
(무슬림들이 먹지 않는 돼지고기, 채식 주의자 등.. 나도 당당하게 오이 알러지가 있다고 했다. 사실 없으나 그만큼 싫어한다는 뜻이지)
그에 대답이라도 하듯 동기(?)들은 다양한 배경에서 왔더라.
싱가포르에서 대학을 졸업하신 한국 분들도 계셨고, 나처럼 한국에서 이직한 분들, 제3의 국가에서 일하다가 오신 분들, 일본 분들, 말레이시아 분들 등등.. 각자의 스토리를 듣는 재미가 있었다.
오랜만에 E 파워를 끌어올려 사교성을 발휘하던 중, 문득 인도 유학 시절과 차이점을 느꼈다.
그때보다 영어 실력은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더 잘되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일반 대화뿐만 아니라, 특히 중간중간에 집어넣는 스몰톡이나 작은 조크 등에서 많이 느꼈다.
짧게 스쳐나간 분석으로는,
1) 대학 시절보다 머리가 커져서 아는 것도 더 많아졌고 대화법도 더 능숙해졌다.
2) 스몰톡이나 조크의 주제가 풍부해졌다.
3) 문화권이 비슷하니 개떡같이 설명해도 대충 알아듣는다.
4) 꼭 친구로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서 오는 여유
항상 갖고 있던 생각인데 역시 영어나 제2의 언어를 잘하려면 모국어를 잘해야 한다.
베이스 언어를 잘하면 그 위에 쌓는 언어들도 더욱 실력이 붙는 것 같다.
물론 더욱 깊숙이 들어가면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하지만 일단은 '영어를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고 이 스텐스를 한 동안은 밀어붙이려고 한다. 한계에 부딪히면 방법을 찾아내겠지 뭐.
Day 1 이라 여러모로 조직을 소개하는 프로그램들로 채워졌는데,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었다.
1부. 조직 소개 및 직원들을 위한 프로그램 소개
2부. 조직의 핵심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액티비티들
1부
1부에서 약간 감동을 받았는데, 꼭 이 회사 직원으로서 필요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한 명의 직장인으로서 필요한 프로그램들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 Career Path 컨설팅 프로그램
- Mentality care 프로그램 (세일즈 포지션이라 멘탈 케어 및 스트레스 해소가 중요한가 보다)
- 해외에서 온 직원들을 위한 싱가폴 정착 프로그램 (돈으로 지원해 주는 건 아니고 그냥 정보 제공임..ㅎㅎ)
내 경험이 부족해서 그렇겠지만, 그동안 다녔던 한국 회사에선 이런 프로그램은 전혀 보지 못했다.
회사 내에서 이뤄지는 모든 활동은 무조건 그 회사에만 도움이 되거나 기여하는 방향성이 짙었던 것 같다.
아마 아직도 로열티를 많이 보는 한국 회사의 특징 아닐까.
반면 여기는 언젠가 직원이 떠날 것을 인정하고 그동안 많이 성장시켜 주고 그 성장한 역량을 회사에 활용해야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서로 윈윈 하는 구조를 만드는 거랄까.
당연하지만 자유를 추구하는 내 스타일에 더 가까워서 좋았다.
2부
2부에서는 핵심가치들을 조별 게임으로 경험했는데,
Teamwork, Initiative, Innovation, Trust, Courage를 조금씩 느껴봤다.
(근데 사실 이런 건 어떤 액티비티를 해도 껴맞출 수 있다 ㅎㅎ)
이건 그냥 보통이어서 크게 기억에 남는 것 없었다.
한국에서 몇 천 킬로 떨어진 곳까지 와서 외화벌이 하는 외노비 인생이 시작됐다.
만약에 대감집이 이상한 곳이면 근처 동남아 섬으로 도망가서 거지꼴로 놀아야겠다는 멋진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늘 첫인상으로 봐서는 당분간 그 계획은 보류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