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싱가포르 생활 4개월이 넘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인사하면서 '얼마나 살았어?' 하면 네 손가락을 보여준다.
그러면 다들 '아 4년 살았구나'라고 말한다.
풍기는 바이브로 보나 외모로 보나 4개월 산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 모양이다.
(갈색톤 피부의 외모는 원래부터 그랬음)
음식도 맛있고 날씨도 내가 좋아하는 '반팔 날씨'다.
이직한 회사의 업무의 적응이나(야근으로 쌓은) 동료들하고 관계도 그럭저럭 좋다.
회사 밖의 라이프도 좋다. 좋아하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테니스 코트도 많아 힘들지 않게 칠 수 있다. 거지꼴(?)로 밖에 나가도 편하다.
이렇게 빠르게 적응하면서 기쁘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초심을 잃기 전에, 무슨 생각으로 오게 됐는지 정리해보려 한다.
전 회사 퇴사 후 한국 생활을 2주 만에 정리하고 왔는데 그만큼 확신이 있었던 걸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여기 올 준비를 하는 나의 모습은 이직이 아니라 도주에 더 가까웠다.
(살던 전셋집은 아직도 대체자를 못 구해 아예 에어비앤비로 탈바꿈했다)
그럼 왜?
나중에 살 노마드 라이프 스타일을 위함이었다.
발리는 내가 그냥 어렴풋이 생각하는 나중에 노마딩하며 살 장소로 떠올리곤 하는데, 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가까이 가려고 했다. 그리고 분명히 맛보기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그 꿈이 허상인지 실제인지 알 수 있으니.
또한, 컴포트 존을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 날 던져 넣으면 멱살에 잡혀 질질 끌려가면서 고통을 동반한 성장이 이뤄지는데, 인정하기 싫지만 그때가 가장 많이 성장한다. 고요한 전 직장에서 변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딱 3가지만 보고 그 외에는 견딜 각오를 했다.
어차피 어떤 선택이던 완벽하진 않지 않던가. 특히 이직은 더더욱.
친구들
일단 내가 정말 좋아하는 친구들이 여기 산다. 태국에 함께 놀러 갔다가 깊게 친해졌고 거기서 소개받은 싱가포르에 사는 친구들까지 소개받으면서 싱가포르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졌다. 그들은 함께 놀면서 나를 계속 꼬드겼고(?) 결국 성공했다.
타지생활도 외롭지 않을 것 같았고 싱가포르 친구들하고도 말이 잘 통했다. 인도 유학 시절보다 문화적으로 더 가까운 느낌이었고 이런 친구들을 직장 동료로 갖는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테크 세일즈
그동안은 뒤에서 서포트하고 모략(?)을 꾸미는 일을 했었더라면 이번에는 돈이 벌리는 최전방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당장 내 월급, 내 옆 동료 월급이 어디서 나오는지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아무리 욕하는 회사라도 몇백 몇 천명 한 달 월급을 주는 수익을 낸다는 게 신기하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결국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일을 하게 될 텐데 '파는 경험'은 너무나도 귀중하다.
그 와중에서 산업은 테크로 고집했는데, 내 미래 라이프 스타일인 리모트 워크와 자꾸 바뀌는 세상에서 귀 기울이기 위해서다.
다양한 문화와 사람
노마드로 살 나에겐 더 넓은 시야가 필요했다. 단일민족의 역사로 이뤄진 한국보다 더 다양한 환경이 있는 곳에서 다양한 생각을 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돈을 벌며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분명히 내가 미래에 살 라이프 스타일에 힌트가 될 거라 확신했다.
4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만족한다.
솔직히 내가 위에 언급한 3가지가 모두 완벽하게 충족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변화를 줬고 나는 새 인사이트를 얻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삶에 또 한 발 더 가까워짐을 느꼈다.
물론 단점도 있다.
방 한 칸에 백만 원은 우습게 넘어가는 렌트도 있고 밥 먹으면서 맥주만 가볍게 한 잔 해도 10만 원은 깨진다.
하지만 이건 여기 물가라는 외부 환경이고 내가 바꿀 수는 없다.
바꿀 수 없는 것으로 불평할 시간에 이걸 최대한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이 정도 렌트와 밥 값은 쉽게 감당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예전엔 그냥 '여유 있는 부자가 되어야지'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이런 환경 덕에 한층 더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알았다.
이렇게 나의 정체성은 또 한 번 바뀌었다.
누군가는 도전하기엔 나이가 많다고 하는 서른 살도 훌쩍 넘어, 2주 만에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온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