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래 Jun 03. 2024

안녕하세요,
기록을 수집하는 한옥입니다

따가움과 간지러움


누군가 한옥 사겠다고, 시골에서 촌집을 고쳐서 사업을 하겠다고 나선다면 뜯어말리겠다. 

당신이 사서 고생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다.


창과 문이 달리기 전 한옥



인테리어 마무리에 접어들면서 입술 발진이 시작되었다. 

어릴 때부터 봄철 꽃가루 알레르기와 비염을 달고 살던지라 이맘때면 간지럽고 벌게지는 입술과 연달아 터지는 재채기는 이상할 것도 없는 증상이다. 안타깝다고 해야 할까, 2023년이 시작하면서 땅만 보고 걸어 다녔는지 꽃이 피고 나무가 울창해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으므로 알레르기도 한발 늦어졌다. 연신 터져 나오는 재채기와 훌쩍거리는 콧물을 달고서 마당에 배롱나무를 심고 가구를 옮기고 청소를 하고 현관 입구에만 집을 짓는 제비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고민을 하다 우연히 하늘을 봤는데 새파랬다. 봄이었다.     


(최최종) 마지막 점검을 앞두고 아무래도 몸도 마음도 힘들었던 모양인지 이상하리만치 멀쩡하던 입술이 어느 날 심하게 부어있었다. 

‘또 이러네’ 

그러려니 두고 지나간 게 오산이었다. 입 주변 빨간 발진은 점점 심해졌고, 새벽이면 간지럽고 따가워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심각성을 깨닫고 뒤늦게 유명하다는 피부과를 찾았는데 흔하디 흔한 접촉성 피부염 진단을 받았고 3주 정도 꾸준히 약을 먹고 착실하게 연고를 바르니 가라앉는 듯싶었지만, 약을 끊자마자 다시 올라왔다. 마치 입술 주변에 커다란 입술을 하나 더 달고 있는 모양새였다. 처음에 웃기다고 웃던 짝꿍도 심각 모드로 돌변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밤에 세수를 하고 로션을 바르면 따가워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곧 있으면 오픈이라 엄마, 아빠, 친구, 진짜 손님들이 찾아올 텐데 어쩌면 좋지? 

어느 순간부터 약을 먹어도 발진은 그대로였고 오히려 더 심해지는 밤이 찾아왔고 조바심과 스트레스에 괴로워하다가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겐 더 시급하게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깟 얼굴 발진쯤 그냥 나 혼자 괴로워하면 될 사소한 생채기였다. 그렇게 무려 두 달 넘게 입술 발진을 달고 살았다.


우선순위는 오픈이야. 발진은 그대로 버려졌다. 내 외모와 가려움을 신경 쓰기에 눈앞에 아주 많은 흠이 존재했다. 우선 한옥 나무 기둥 곳곳에 네모난 홈이 파여 있었다. 이전에 가로로 기둥을 끼웠던 자리였을까 지금은 쓸모없는 장치일 뿐이었다. 그대로 두면 비가 올 때 빗물이, 추울 땐 찬바람이 숭숭 들어올 게 분명했으니 반드시 막아야 했다.     


“여기는 뭐예요?”

“아, 나중에 막을 겁니다. 원래 뚫려 있던 자리예요.”

     

공사가 막바지에 다다랐고 통창과 미닫이문이 들어오고 단단하게 실리콘 마감까지 끝났는데 나무 홈은 그대로였다. 여기도, 저기도, 막혔어야 할 구멍이 그대로인데 저들은 일전에 나눴던 대화를 (또) 까먹은 게 틀림없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현장에 도착했는데 나무 홈 몇 군데에 폼을 쏴서 채워놓고 눈속임을 위해 월넛 색상 페인트로 칠해놓은 끔찍한 광경을 마주했다. 이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귀찮으시더라도 마무리로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하지 않겠어요?

폼을 쏘고 칠해놓으셨던데, 이곳을 방문하는 손님들이 보시고 무슨 생각을 하실까요?”     


다음날 총출동한 인테리어 회사 직원들은 하루 종일 나무 홈 수치를 재고 나무를 자르고 페인트를 덧칠하며 (진짜) 최최종 마감에 돌입했다.     


그 무렵 살던 월세방 계약 기간이 끝나 또 다른 월세방으로 이사를 가야 했는데 급히 알아보느라 이성적인 판단을 할 기회가 없었다. 마음에 든 널찍한 투룸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이었다. 살림이 많은 것도 적은 것도 아니라 이삿짐센터를 쓰기도 뭐해서 우리 집 제3의 멤버 깜장 SUV에 짐을 싣고 7-8번 정도이고, 지고, 나르고 이사를 했다. 아무리 운동을 해도 붙지 않던 팔근육이 이때 다 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옥에 가구를 들여놓고 나서도 자리배치를 계속해서 바꾸느라 힘쓸 일은 끊이지 않았고, 제작한 노트와 엽서 같은 무거운 제품도 연달아 도착했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이 세상에 우리 둘이 못할 일은 없을 것 같아.”

공사도, 이사도, 제작도, 너랑은 다 할 수 있어.


행복한 일도 많았지만 역시 사람은 함께 고생해야 더 단단해지는 모양이다. 사랑을 넘어서 동지애가 생겨났다. 사실 많이 싸웠다. 서로 다른 배경에서 성장한 두 성인이 다른 기준과 감각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책상을 어디에 놓고 조명을 어떻게 배치하고, 의자를 새로 살지 말지 정말 수백 번 싸웠다. 짜증과 눈물 몇 방울, 한숨과 냉전을 거쳐 원만한 합의에 도달했고 이젠 결정을 앞두고 어떻게 소통하고 합리적인 선에서 마무리하는지 요령을 터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운다.)     




2023년 6월, 한옥 대문을 활짝 열었다.

아무도 없는 어중간한 오후 시간이면 어김없이 캠핑 의자를 들고 나와 마당에 멍하니 심어놓은 꽃나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릴없이 농땡이를 부리며. 

‘아늑한 마당이 있어 좋긴 하네.’ 




개인적으로 한옥의 최대 장점은 안과밖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철저하게 단절된 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아파트는 또 다른 단절과 복제의 공간이다. 창문을 열어도 맞은편 아파트가 있거나 흐린 하늘이 보이고 이 집이나 저 집이나 구조가 동일하다. (어쩌면 침대를 놓는 자리까지 동일할 지도 모른다.) 나무로 지은 집은 안에 있어도 차갑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무 기둥을 쓰다듬다가 숫대살 미닫이 문을 열면 바로 마당이다. 햇살이 스멀스멀 기어들어오고 해마다 제비가 찾아온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배워간다. 많이 힘들었지만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이곳저곳 우리의 손길이 묻어 진짜 ‘집’이 되어가는 한옥을 보면 마음이 벅차오른다. 종종 말썽을 부리는 여러 인테리어 하자에 혹여 한옥이 우리의 실수는 아니었는지 마음이 복잡해지지만, 마당에 나와 햇빛을 쪼이면 삶에 대한 감사함으로 벅차오른다.

'아, 삶은 아름다워.'


당신이 한옥을 사서 수리한다면 뜯어말리겠지만, 그래도 의지가 확고하다면 일단 여기 한 번 와보고 생각하라고 권하고 싶다. '당신, 따가움과 간지러움을 참을 수 있겠어요?'


아, 입술 발진은 어느 날 씻은 듯 사라졌는데 아마 오픈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라더니.”

다행히 아직까지 다시 발진은 올라오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