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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Aug 12. 2024

샤라웃 투 미스터 테리

레터프레스 이야기 2

        

‘살면서 인연이란 게 있는 법이야.’     

어릴 땐 잘 몰랐다. 

나만 잘하면 되는 거고 내가 잘나면 되는 거지 뭔 인연이고 사람이 중요하단 말이야. 근데 어른들 말대로 살다 보니 가장 귀한 건 인연, 무서운 것 또한 사람이다.


레터프레스 조립하기


페이스북 하나에 매달려 있을 수만은 없어서 소위 레터프레스 복원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서너 명 찾아냈다. 외국에는 옛 물건들을 싼값에 사들여 복원 후 되파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문득 명절 때 온갖 케이블 채널이 나오던 할머니네 집 TV에서 보던 <전당포 사나이들>이란 미국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배가 불룩하니 튀어나온 무서운 아저씨들이 희귀한 물건을 주고받고, 때로 흔해 보이지만 경매가가 억 단위인 귀한 물건이 나오기도 해 할 일 없는 우리는 TV 앞에 앉아 미국의 전당포와 아저씨들의 거래 스킬을 보고 감탄을 내뱉었다.


“와, 전당포는 어떤 곳일까?”

“미국에서 중고 거래하다가 수 틀리면 총 맞는 거 아니야?”     




미국 전당포에 가면 레터프레스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직접 가보는 건...

“이참에 우리가 미국까지 가서 직접 사 오는 건...”

“금리를 보고 그런 소리를 해라.”

“간 김에 여행도 하고, 비용도 아끼는 거지.”     


그냥 꿈에 젖은 흰소리였다. 차라리 직접 가서 픽업하고 가져오는 게 나을 정도로 서류 절차나 운송 과정이 복잡했고 개인 거래를 원하는 사람들은 굳이 불편을 무릅쓰면서 바다 건너 먼 한국까지 보내주려 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사기를 당해서 의욕이 잔뜩 떨어졌는데 정작 떨어질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이는 환율 덕에 레터프레스 가격은 날이 갈수록 치솟았다. 의기소침해진 무렵 여기저기 뿌려놨던 이메일에 하나둘 답장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어떤 모델을 원하시는데요?”
“C&P 파일럿이요.”

(Chandler & Price Pilot의 줄임말)

“아... 지금은 없는데 우리가 꾸준히 구하고 있어요. 게다가 한국에 보내본 적도 몇 번 있고요.”
“그럼 대기에 올려줄 수 있나요?”
“그래요, 당신은 대기 13번이에요.”


13번?!


“13번이요? 이게.. 그럼 제 차례가 오려면 어느 정도 걸릴까요?”
“글쎄요, 그건 장담할 수 없겠지만 일단 대기에 올려줄게요.”     


1년에 1~2개 정도 겨우 구해서 수리한다는 가정 하에 최소 6년이 걸린단 말이잖아. 잠깐, 좌절하기엔 이르다. 영국에서도,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도 연락이 왔다. 영국 복원가는 미제 C&P는 아니지만 비슷한 복제품을 판매한다고 답변이 왔는데 가격이 말도 안 되게 비쌌다. 게다가 1파운드에 1,800원을 뚫던 시기였다. 비싸거나, 원하던 모델이 아니거나.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이유는 각양각색이었지만 이거 하나는 동일했다.

'배송은 안 돼요. 직접 팔레트로 싸고 배든 비행기든 운송까지 신청해야 해요.'


모든 판매자가 튼튼한 나무 궤짝을 짜서 기계를 안에 넣는 것부터 해외 운송을 위한 서류 작성과 물건을 갖다 놓는 것까지 직접 하라는 식으로 나왔다.     


“우리 잠시만 이러고 있자.”

좁아터진 2인 소파에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어쩌면 좋지. 괜한 욕심을 부렸을까? 그렇게 레터프레스를 잠시 놓아버렸다.     



그리고 한 달 뒤, 모니터 하단에 알림이 떴다. 익숙한 메일주소였다.   

"안녕하세요, 여전히 레터프레스 구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연락드립니다."

대기번호 13번이었다!


"당연하죠. 지금도 구하고 있어요."
"그럼, 원하던 C&P 모델 하나가 완벽하게 복원되었는데 어때요"

          

메일을 받자마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지만 의심의 빛을 지울 순 없었다.     

“13번이라며.”

“그러니까. 한 달 사이에 13대를 구한 거야?”     


괜히 의심만 많아져서 잔뜩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날카로워졌다.      

“그래도 프로필 사진은 인자해 보이지 않아?”

“말투도 되게 젠틀맨 같잖아. 이름이랑 전화번호랑 주소까지 다 적어놓고.”     


잠시나마 의심해서 죄송스러웠던 미스터 테리, 테리 아저씨는 레터프레스 복원 사업을 아주 오랫동안 해온 베테랑으로 거래하기로 한 건이 틀어지자 내가 생각났다면 연락을 주셨다.

"원 구매자가 사정이 생겨서 여유가 생겼어요. 괜찮으면 이 모델로 할래요?
"너무 좋아요."     


테리 아저씨는 친절한 사업가였다. 메일 답장도 빠르고, 기계 복원, 포장, 서류 작업, 해외운송까지 모든 걸 처리해 주니 우리는 정확한 액수를 실수 없이 계좌에 입금하기만 하면 끝이었다. 2주 동안 메일을 통해 물건 사진을 확인하고, 거래 정보를 주고받고, 레터프레스 관련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면서 가족보다 더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고 그 과정에서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관계가 형성되었다. 엄지손톱만 한 작은 원 안에 들어간 프로필용 사진뿐이지만 백발의 인자한 미소를 띤 미스터 테리의 이미지와 친절한 메일 내용이 절묘하게 섞이며 알고 보면 재미있는 <전당포 사나이들>의 아저씨 같은 기분이 들었다.


2024.6.xx

입금했어요. 잘 들어갔는지 모르겠네요.


2024.6.xx

걱정 말아요. 은행에 확인해 볼게요. 문제 생기면 바로 연락할게요.


2024.6.xx

돈이 들어왔어요.

내일 주말이니까 다음날 바로 보내줄게요.


2024.6.oo

방금 보내고 왔어요.

송장번호: 123ABC56JEH

(다수의 사진 첨부)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경상북도 안동까지 3일 만에 날아온 나무 궤짝은 아주 듬직해 보였다.

“안 밀리는데?”

어찌나 듬직한지 건장한 성인 남성이 밀어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궤짝 무게까지 100kg 초과. 안으로 가져갈 엄두가 나지 않아 그 자리에서 궤짝을 한 짝씩 분해하고 부품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무 조각과 부재료들을 꺼내야 했다. 기계 관리에 필요한 오일과 까만 잉크, 이에 따른 MSMF 서류 그리고 판 사이즈 조절을 위한 나무조각 한 무더기와 키(coins) 두 봉지까지 꼼꼼한 포장을 풀어도 풀어도 언패킹은 끝나지 않았다.



히래에게

잘 받았다니 다행이네요.
우리는 15년 동안 이어왔던 사업을 정리하고 조금 더 따뜻한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어요. 
그동안 200대가 넘는 레터프레스를 복원하고 새로운 주인을 찾아주는 일을 해왔는데,
당신은 우리의 마지막 고객이었답니다. 그래서 작업할 때 필요할 부재료 이것저것 많이 넣었어요. 
행운을 빌어요. 

p.s 궁금한 게 있다면 언제나 메일 줘요.

테리로부터


우리는 13번째가 아니라 마지막 고객이었다. 친절한 테리 아저씨 덕분에 물레바퀴가 달린 커다란 모델은 아니지만 강인한 레버가 달린 실용적인 탁상형 레터프레스가 한옥으로 들어왔다.

   

테리 아저씨는 내 앞의 12명을 뛰어넘어 왜 내게 연락을 취했을까. ‘혹시 내게 가장 먼저 연락한 건가요?’ 물어보지 못해 아쉬움이 남지만 되려 순서를 넘어 우리를 택해줬다는 상상으로 감사한 마음이 짙어진다. 어쩌면 내가 보낸 메일 내용이 마음에 들었던 걸 수도 있고(서울도 아닌 아랫지방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한옥에 왜 이게 필요하며 어느 위치에 어떻게 둘 것이며 이런 작품을 만들 거다 등등 구구절절 한 편의 에세이와 같은 메일을 보냈다), 한국이란 나라에 호감이 있을 수도 있고, 숫자 13을 좋아할 수도 있고, 인스타그램에 올려놓은 사진과 감성이 좋았을 수도 있겠다.


'뭔가 연결고리가 있었던 거야. 우리가 인연이 되려고 그랬던 거지.'

어른들 말씀 틀린 거 하나 없다. 사람이 중허다.



Shout out to Mr. Ter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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