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를 찾아서>
상수씨와 함께 한 그날의 바다 여행을 잊을 수 없다.
바다는 매년 여름 봐왔지만, 그날의 바다 여행은 달랐다. 알고 지낸 지 일주일밖에 안 된 세 명의 청년이 버스를 타고 떠난 여정, 낡은 시외버스의 진동 속에서 뛰는 심장은 설렘인지, 불안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대학 시절, 방학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두 달은 무료하게 느껴졌다. 자진해서 도서관으로 출석했고, 책을 읽다가 방학 기간 운영 시간이 짧아진 교내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서 교정을 거닐었다. 물론 내게도 방학을 고대하는 이유가 있었다. 해외여행. 학생이라는 단단한 울타리 안에서 금전적 지원을 받고 이웃 나라를 탐방할 기회가 종종 있었고, 덕분에 다양한 나라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반둥은 우연한 기회로 참석하게 된 학생 콘퍼런스 덕분에 방문하게 되었다. 화산 폭발이 잦은 인도네시아의 자연재해 대처 방안과 정책을 논한다는 아주 거창한 사명을 띠고 세계 각국에서 20대 초중반의 대학생들이 반둥으로 모여 인도네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자바섬 이곳저곳을 탐방하는 워크숍이었다. 우리는 전문가 강연을 듣고, 팀별 토론을 하고, 나름의 방안을 세우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최종적으로 발표까지 하고, 수료식에 참여하면 재학 중인 학교에서 1학점 인정받을 수 있는 증서까지 받는 진정한 워크숍이었다. 단순히 공짜 여행 기회라고만 여겼던 명목상 콘퍼런스에 이토록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참여할 줄 누가 알았을까. 참여자들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마지막 날 펑펑 울면서 이별해야 했다. 한두 시간 걸리는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덴마크, 호주, 스위스... 평생 한 번 여행할 수 있을까 싶은 나라에 사는 이들을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계속 연락해야 해.”
“다시 만나자.”
강조하듯 ‘다시’를 두서없이 중얼거리는 이유는 만날 기약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걸까? 한국에서 인도네시아까지는 7시간이 넘게 걸린다. 일주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비행기표를 예매할 때 수료식을 마치고도 나흘 정도 더 머물 수 있도록 스케줄을 조정해 놓은 참이었다.
나타샤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익숙했다. 그녀는 콘퍼런스를 주최한 대학교에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남은 시간 동안 더 어울릴 수 있었다. 우리는 오래된 짝꿍처럼 붙어 다녔다. 함께 점심을 먹고 있는데 요한에게 연락이 왔다.
“요한도 아직 반둥에 있대. 오늘 바다에 간다는데?”
“그래? 여기서 바다가 가까워?”
“서너 시간이면 도착할걸? 괜찮으면 같이 가자고 하네.”
갑작스러운 제안에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24시간 뒤에 자카르타에서 서울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 당시, 불안을 안고 살던 나는 안 보이는 것들에 대비하는 ‘불안이’ 같은 사람이었다.
“가고는 싶은데...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막히지는 않겠지? 바다가 얼마나 가야 한다고? 가서 뭐 할만한 건 있어?”
불안은 내 습관이었다. 갈팡질팡 망설이는 동안에도 마음 한편에는 ‘후회하느니 해보자’라는 마음이 존재했다. 틀어지면 어쩌지, 예기치 못한 상황이 생기면 어쩌지. 하지만 결국 ‘안 가면 어차피 후회할 거야.’ 그래도 서울행 비행기 안에서 ‘갈걸’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우리도 가자. 요한에게 연락해.”
수십 대의 버스가 줄지어 서 있는 장관이 펼쳐졌다. 어느 도시에서도 이렇게 넓은 버스터미널에 이렇게 많은 버스가 정차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요한은 핑크색 줄무늬가 인상적인 낡은 버스 옆에 서 있었다. 하이킹에 나서는 사람처럼 커다란 배낭을 메고 환하게 웃으며 나와 나타샤를 반겼다. 헤어진 지 3일밖에 안 됐지만, 마치 3년 만에 만난 친구처럼 얼싸안고 인사를 나눴다.
“근처에 수상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바다가 있다길래, 처음부터 가볼 계획을 세우고 있었어.”
“그래? 오늘 가면 언제 돌아가려고?”
“나는 삼일 정도 있다가 발리로 가려고. 국내선 이용하면 가까워.”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삐걱거리는 버스에 올라탔고, 가장 뒷 좌석으로 향했다. 보통 다섯 자리인 맨 뒷줄이 여섯 자리가 되는 이상할 정도로 좁은 버스였다. 나란히 바짝 붙어 앉은 우리는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서로를 꽉 붙잡아야 했다. 버스는 이렇게 달리다가 두 동강 나는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흔들렸고, 방지턱이나 도로가 울퉁불퉁할 때는 엉덩이가 공중으로 붕 떴다가 착지했다. 분명 뽑기 운이 안 좋았던 것일 테다. 한 시간 정도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는 끼익 정차했다.
“무슨 일이지?”
버스 안 승객들은 모두 태연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 요한을 제외하면 인도네시아 사람이었다. 운전기사가 설명하는 말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다들 편안하게 자세를 잡았고, 나와 요한만 목을 길게 빼고 두리번거렸다.
“버스가 고장 이래. 수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봐.” 나타샤가 말했다.
“그럼 언제쯤 도착할 수 있는데?” 나는 덜컥 불안해졌다.
“그게... 버스 기사도 모르겠대.”
24시간 뒤, 자카르타에서 서울행 비행기가 출발한다. 게다가 반둥에서 자카르타까지 막히면 4시간이 넘게 걸린다. 이러다가 비행기표를 새로 끊어야 하면 어쩌지? 자카르타까지 제시간에 갈 수나 있을까?
“늦어지면 오토바이 타고 공항까지 가면 돼!”
잔뜩 긴장한 내게 나타샤가 차선책을 제안했다. 출퇴근 시간에 꽉 막히는 인도네시아 도로에서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면 2시간 안에 도착한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그래, 버스는 곧 출발할 거야. 오토바이 타고 공항까지 가지 뭐.’
1시간, 2시간...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함은 더해졌고, 어느덧 어둠이 찾아왔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오징어 배처럼 우리가 타고 있는 버스는 새까만 도로 위에서 노랗게 빛났다. 나를 제외한 모든 승객이 한껏 늘어져 잠을 자고 있었다. 나타샤마저 잠들어 버린 탓에 운전기사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도대체 언제 출발하냐고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손짓 몸짓 다 동원해 버스는 언제 오냐고 물었다. 그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귓가에 갖다 대며 이렇게 눈짓했다. ‘잠이나 자 둬요.’
‘나 지금 영사관에 전화해야 하나? 입국했을 때 문자로 비상 연락처가 날아왔는데, 진짜 걸어?’
“며칠 전에 오토바이 폭주족이 저지른 살인 사건이 있었어.”
반둥에 도착한 첫날 나타샤가 공유한 으스스한 사건이 떠올랐다. 설상가상으로 30분에 한 번씩 요란한 오토바이 무리가 쌩하니 버스 옆을 지나쳤다.
‘안 되겠다. 전화해야겠어.’
결심한 순간 ‘쿵쿵쿵’ 요란하게 버스를 내리치는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주먹으로 버스 앞문을 가격하는 소리가 분명했다.
독일 포츠담에는 상수씨 궁전이 있다. 궁전을 품고 있는 공원은 상수씨 공원(san souci park)으로 18~19세기 유럽 조경을 품고 있다. 공원을 걸으면 근심 걱정이 저절로 사라질 것 같은 크기와 웅장함을 자랑한다. 상수씨. 처음 듣는 순간부터 내 마음에 콕 박혀버린 단어다. 걱정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내게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상수씨, 릴랙스.”
“상수...씨?”
“불어로 걱정 없다는 뜻이야. san souci. 독일에 상수씨라는 공원이 있어.”
상수씨. 걱정 없는 사람.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이름이었다. 불안과 걱정으로 흥분한 나를 가라앉히는 한 마디. 한국에 ‘상수’라는 이름이 있어서 미스터 상수를 한국어로 하면 상수씨가 된다는 설명에 요한은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이라곤 하나도 없을 것 같아, 상수씨는.”
요한의 한마디는 내 삶의 주문처럼 남았다. 초조하고 불안한 상황이 닥칠 때마다 ‘상수씨, 걱정하지 말자’를 중얼거리곤 한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이유 없는 불안, 습관처럼 튀어나오는 불안을 바라보며 ‘상수씨’를 찾는다.
며칠 전 나타샤에게 연락이 왔다. 나타샤는 대학을 졸업하고 수도 자카르타로 상경해서 마케팅 관련 업무를 하고 있다. 실제로 나보다 어리기도 하지만, 마치 내 여동생 같아서 잘 사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다.
“다음 달에 한국에 가게 되었어! 우리 만나자.”
“사실 나 시골로 이사 왔어.”
“어디? 서울에서 멀어?”
어디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인도네시아로 치면 자카르타에서 반둥과 같은 거리라고 설명했다. 더는 불안에 치이고 싶지 않아서, 조용한 시골로 내려왔다고 말했다.
“san souci ici.”(여기서는 걱정이 없어)
나타샤는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아무리 반복해도 질리지 않는 바다 여행 에피소드를 또 꺼낸다.
“그때 네 표정은 정말이지...”
“오토바이 뒤에 대롱대롱 매달린 건 또 어떻고.”
(결국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공항까지 내달렸다.)
‘쿵, 쿵, 쿵’
다행히 우리를 구하러 온 버스 운전기사가 두드리는 소리였다. 우리가 탄 버스는 꽝이 맞았다. 한참 뒤 도착한 구세주 버스는 새빨간 고속버스로 내부 조명부터 밝았고, 좌석 간격도 넓어 편하게 발을 뻗을 수 있었다. 게다가 가죽 시트였다. 나와 나타샤 그리고 요한은 바다 마을에 무사히 도착했다. 새벽 5시. 모두가 잠든 시각 정류장에 내렸을 때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운 좋게 인력거를 두 대 잡아서 요한이 예약해 둔 숙소로 향했고, 편하게 몸을 누일 수 있었다.
새벽 6시, 바다는 볼품없었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했고, 바다는 우중충했다. 모래사장마저 빛을 발하지 못해 우울해 보였다. 수상 스포츠는 이미 물 건너갔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우리는 바다에 도착했다.’ 그게 중요했다. 역경을 이겨내고 바다에 도착했다는 사실. 함께 거친 파도를 바라보며 고장 난 버스와 불안 따위를 뒤로하고 한껏 웃고 있다는 사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하늘과 바다뿐만 아니라 우리 얼굴도 잿빛이다. 그렇지만, 아주 환하게 웃고 있다.
아침으로 팬케이크를 먹고 8시 차를 타고 돌아왔다. 바다를 보러 떠난 여행이었는지, 내 불안을 떨치기 위한 여행이었는지 뜻밖의 행운을 만난 인도네시아 바다 여행에서 나는 상수씨를 알게 되었고 무사히 서울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불안은 내 습관이었지만, 상수씨는, 그 습관을 잠시 멈추게 해 준 이름이 되었다. 언젠가 이름만 들어도 모든 걱정이 사라질 것만 같은 공원에 직접 가고 싶어졌다. 공원 입구에 발을 들이는 순간 걱정이 증발할지도 모른다. 진짜 상수씨 공원에 도착하면, 그날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여전히 걱정은 나를 찾아오지만, 이제는 상수씨를 부르며 웃어 넘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