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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수작가 Jul 20. 2018

이간질 그리고 사피엔스

본성의 민낯에 대처하는 자세


단어의 어감도 불온한 ‘이간질’은 이 땅에서 그 뿌리가 깊다. 일본에게서 도입한 차관 1300만 원을 갚아 주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국채 보상 운동에 대한 일제의 ‘이간질’은 간악했다. 역전 노동자들의 땀에 젖은 돈, 기생들의 금붙이 노리개 등 조선 민중들의 피땀 어린 성금들이 모여들자 일제는 패악스러운 ‘이간질’로 그 운동을 주도했던 ‘대한매일신보’에게 횡령의 죄를 뒤집어씌운다. 종국에는 무죄로 판명 난 일제의 ‘이간질’은 조선 민중의 단결을 깬 대표적 사건이다. 어디 거창한 역사뿐이랴. 오늘날에도 사인 간의 ‘이간질’은 상생을 버겁게 한다.

‘이간질’은 사이좋은 두 명, 혹은 개인과 한 무리 사이의 관계를 틀어지게 만들기 위해 한 사람의 인격적, 사회적 평판을 떨어뜨리는 야만적 행위이다. 누군가의 질투와 ‘이간질’로 하루아침에 믿었던 신뢰가 무너지는 모습은 흔하고 일상적이다. 신뢰를 나눈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시간이 지나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면 이기적인 욕심과 입장의 차이에 따라 분절된 관계로 치닫게 되는 것은 사피엔스의 속성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본성은 면책 사유가 될 수 없다.

모두가 미더운 인간관계를 추구한다. 신의의 가치를 중요시해 이해득실에 따라 관계를 맺고 끊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포장된 인간관계의 내면에는 이해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의 욕심과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목숨을 바치며 신의를 지킨 고려 말의 단심가 정몽주나 조선시대 사육신은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인간관계가 만연해 있는 오늘날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른바 ‘넘사벽’의 위인들이다. 그러나 그리 살 수는 없어도 그 길을 향해 가야한다. 인생은 수행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고 그것을 유지하는 일은 사피엔스의 오래된 숙제이다. 변덕스러운 마음의 변화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상대에 대한 예의를 유지하고 관계를 정확히 인지해 그 선을 넘지 않도록 노력한다면 적어도 타인의 ‘이간질’과 상대의 변덕에 휘둘리는 비극을 맞이하지는 않는다. 허나 우리는 이익과 감정에 유약한 사피엔스다. 정도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는 프랑스 대혁명의 경우처럼 사람들의 생각은 하룻밤 사이에도 바뀔 수 있다고 한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사피엔스가 놀라울 정도로 잘하는 영역이 있는가 하면, 같은 정도로 잘못한 영역도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새로운 힘을 얻는 데는 극단적으로 유능하지만 이 같은 힘을 모아서 더 큰 행복으로 전환하는 데는 매우 미숙하다. 우리가 전보다 훨씬 더 큰 힘을 지녔는데도 더 행복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라고 말한다. 분열과 갈등으로 더 큰 행복을 막아서는 악인들의 ‘이간질’도 그 주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선 아무리 특별한 관계라 하더라도 넘어선 안 될 선이 있다. 인간관계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신뢰관계이기 때문이다. 그 신뢰와 무관한 제3자는 철저히 자기 위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그것이 때론 인간관계에 치명적인 해악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제3자의 개입에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인간관계는 둘만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때론 불특정 타자와의 연결된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삶 속에서 조건을 따지지 않는 인간관계가 가능한가. 조건을 따지지 않는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나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위해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 아닌가를 돌아보는 통렬한 자성은 ‘이간질’에 대처하는 사피엔스의 유용한 자세이다.

이간질에 넘어간 상대를 탓하기 전에, 그 이간질이 상대에게 나에 관한 오해를 야기한 이유가 무엇인지 돌아봐야 한다. 적어도 그 이간질이 그럴 듯해 보일 인격적 빈틈이 내게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성찰이 필요하다. 서로의 신뢰가 이간질에 넘어갈 정도로 가벼운 것이었는지 돌아보는 태도는 인간관계의 바탕이다. 당장은 모질지 못해 내 마음이 가볍고자 타인을 모략하는 이들의 스물 거리는 말들을 거리두기하지 않는다면, 객관적으로 살펴보지 않는다면, 그 이간질의 언어에 내재된 부정성과 공격적인 태도는 독이 되어 우리의 영혼을 마비시킬 것이다.

‘이간질’에 능욕당하는 우둔함은 결국, 내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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