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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창성 Aug 22. 2018

니 그거해서 뭐 할라고?

취준생에서, 미생으로.

19살 겨울의 우창성이 그랬다.
"아빠. 나 광고홍보학과가서 마케팅 배우고, 광고도 만들고 그렇게 멋나는 직업 가지고 살래!"
18세부터 일을 해온 53세의 우유복씨는 아들이 국립 대학교를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남들 다 아는 국립 대학교에 가서,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제쳐놓은 학벌에 대한 열망을 아들로 채우고 싶었다. 우유복씨가 말했다.
"그거 해서 뭐하게."
다시 19살의 우창성이 맞받아쳤다.
"뭘 뭐해 이거 하는 거지.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을 아는 것은 행복이래. 아부지"


4살, 어머니 그리고 칸마리.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하나밖에 없는 아드님'이였던 아들. 애지중지 길러온 아들이 원하는 방향을 가고 싶다는데. 어쩌겠냐. 라는 심정으로 아들을 마케팅의 길로 보냈다. 광고홍보학, 마케팅의 길을 알아서 보낸 것이 아니라, 아들이 하고싶다길래 보냈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광고홍보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우창성이 됐다. 아직 해보지 않아서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름 자기 자신에 대한 통찰을 많이 한 갓 20살의 우창성은 '좋아하는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비교적 확고했다.

대학교 1학년, 잘 살고는 싶은데 돈이 없었다. 넉넉한 용돈을 받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시간을 죽여가면서 내가 하기 싫은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싶진 않았다. '멋'나는 디자인으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좋아하는 것을 사고, 느끼기 위해서 그랬다. 다짜고짜 포토샵을 켰고, 선배들과 친구들에게 열심히 포토샵을 배웠다. 그렇게 '생계 목적'으로 배운 디자인으로 공모전에 나갔고, 포스터 외주를 맡으면서 돈을 모았다. 모은 돈으로는 <레트로잉>이라는 빈티지 쇼핑몰을 차렸다. 쇼핑몰이 망했고, 쪽팔려서 군대에 갔다.

2년 남짓의 시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쓰고 내 미래를 그리는 일을 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이버 지식 정보방(이하 사지방)과 잡지를 보러 가는 순간이 가장 즐거웠다. 매일 똑같은 것들을 보다가, 새롭고 계속 변화하는 것들을 봤다. 그 순간이 즐겁고 감사했다. 사지방에서 페이스북을 켜면, 동기들이 해외 연수를 가고. 공모전에서 상도 참 많이 타는 모습을 봤다. 시기와 질투가 이런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남들의 행복을 보면서 불안해하는 나 자신이 추했다. 잡지를 들었다. 김중만이라는 사진작가의 인터뷰가 눈에 들어왔다.

"불안함과 불확실함은 크리에이티브를 만든다.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상황이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다."
이 말에 꽂혀서 군대에서, 공모전에 나갔다. 사단장 상도 타더니, 육군참모총장 상도 탔다. 육군 상병이 육군 대장 옆에서, '김치'하고 해맑게 사진을 찍고 나왔다. '왜 안 떨렸을까'라는 생각을 해보면, 좋아하는 일로 인정 받아서 '내가 너무 자랑스러워서' 안 떨렸던 것 같다. 상을 받고 결심했다. '내가 진짜 진짜 진짜 자랑스러워지는 일을 해야지!'

전역을 했다. 군대에서 준비해둔 '좋아하는 일'을 실행에 옮겼다. 말 그대로 사업이 번창했다. 가족에게 현물로 도움이 될 수 있었고, 덕분에 믿음도 얻었다. 어머니의 눈에는 아들이 만들어준 쌍꺼풀이 생겼다. 또 한 번 확신을 얻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는구나.'. 바쁘고, 자랑스러운 날들을 보냈다.
'너 이거 한번 해볼래?'

군대에서 저 멀리서 항상 '우탕텅'하고 부르던 사람이 있다. 중위였던 것 같은데, 나보다 2 개월 정도 더 빨리 사회로 나갔다. 그 사람이 '너 이거 한번 해볼래?'라면서 크라우드 펀딩을 말했다. '나를 귀여워 해줬으니, 예의상 듣는 척 하고 넘겨야지.'했는데, 들어보니 재밌고 마냥 해보고 싶었다. 선구자가 되는 것을 즐기는 나라서, 남들이 해보지 않은 그런 일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합쳐져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또 다른 창업으로 이어졌고, 내가 소셜벤처를 운영하면서 '어떤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짜릿하고 자랑스러웠다. 세월호 유가족, 독거노인을 만나면서 나누는 마음을 다졌다.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만들고 싶어서, 대표가 됨과 동시에 '아마추어 마케터'가 됐다. 내 기준에, 하는 일마다 잘됐다. 운이라고 하고 싶지만, 계속 잘됐다.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하는 기업에게 연락이 많이 왔다. 그들을 도와주면서, 희열을 느꼈다. 작은 도움이 큰 감사로 오는 순간이 좋았다. 알고 싶은 것들이 많은 내가,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는 것이 즐거웠다. 짧게 안 것들을 적당히 아는 척하는 것은 미친 듯이 즐거웠다.

모든 창업 활동, 학생 활동을 정리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한, '취준생'이 됐다. 어느정도 취업 준비를 하다보니, 숨고 싶었다. 거절하는 법을 잘 몰랐고, 거절당하는 법은 더더욱 몰랐다. '모르는 상태'에서 거절을 계속 당했다.


자취방에서, 거절을 뒤로하고


사실 촉망받는 인재나 실패 없는 플레이어는 아니다. 그다지 대단한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나름 괜찮은 사람이라고, 혹은 나보다 어린 누군가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는 사실에 어깨를 으쓱하며, 우쭐대며 지냈다. 대단한 사람이라고 자위도 많이 했다. 늘 거절의 시작은 몇 단계 합격으로 기대의 씨앗을 심어주고 나서였다. 어딘가의 관심은 되지만 미칠듯한 필요가 되지 않는 다는 사실에 굉장히 쓰라렸다. 나는 분명 어디에서나 필요한 사람이고, '잘 되는'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너를 대체 왜 안 데려가..?'
'너를 담기에는 그 기업의 그릇이 너무 작았나보다..^^'
라는 위로가 지겨웠다.
위에서 언급한 '우탕텅 중위'와 떨어질 때마다 전화를 했다. 아니, 떨어질 때 마다 전화가 왔다. 참 신기했다. 위에서 받은 위로와는 차원이 다른 '팩폭'으로 뼈를 때렸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는데, 되새겨보면 상투적인 위로보다는 더 중요한 말이었다.

'이 사람. 나랑 정말 다른데, 소름돋게 비슷한 사람이다.'
라는 생각이 어느 순간 머리 속에 자리를 잡았다. 그 뒤로는 이 사람이 어떤 것을 원하는지, 어떤 반응을 원하는지 조금 더 수월해졌다. 이 글이 연애편지는 아니다. 나랑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니까, 이 사람이 하는 일이 내가 원하는 일이지 않을까? 라는 고민을 하게 됐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
시기적절하게 취향을 저격하는 글을 브런치에서 봤다.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는 있었는데,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라우드 펀딩 메이커에서, 프로젝트 디렉터가 되기 위한 여정이 시작됐다.

'이 캐릭터를 활용해서 어떤 프로젝트를 하면 재밌을 것 같아요?'
질문을 받았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을 읊었다. 읊는 한 마디 한 마디에 떨림과 설레임이 섞여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곤 확신했다. 여기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기업에 간다. '것 같은 기업'이니까, 사실 아직 모른다. 하지만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춰야하는 기업에 갔으면, 이런 설렘은 없었을 것 같다. 잘하고 싶다는 생각, 좋은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든다. 하지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모습이 이런 나를 만들었으니 괜찮다. 강박처럼 따라다니는 이런 생각들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조금 덜 행복 했을 것이다.

판교라는 바다 속으로 (@cheapyart)

내 떨림과 설렘을 알아주는 기업에 간다고 생각한다. 잘릴 수도 있고, 생각보다 별로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근데 아직 듣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나는 내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믿으니까, 괜찮다. 어이없게도 지옥철의 코끝 아릿한 땀 냄새가 벌써부터 설렌다.

판교라는 바다 속으로 (@cheapyart)

"니 그거해서 뭐할라고."라고 물어보면, 이제 조금 더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빠에게, 엄마에게, 누나에게, 친구에게, 901 호 할머니에게, 우리집 강아지 봉구에게, 모두에게 자랑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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