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부모님과 여름휴가를 다녀온 지 2주 후 시댁 가족들과 여행을 떠났다. 시부모님, 시언니네 부부와 조카들까지 9명이 함께한 여행.
채식과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하는 사람에게 여럿이 함께 모이는 모임은 언제나 불안이 존재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회용품을 사용하게 될지 모르고 다 같이 고기를 먹으러 가게 될 수 있다. 동물원에 가자고 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아직 대처 방안이 없어 상상만으로도 곤란한 상황들이 한가득이다.
친정에서는 내 마음대로 해도 괜찮지만 시댁 가족들 사이에서는 아무래도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편하게 대해주는 식구들이라고 해도 대장 노릇하던 친정과 같을 수는 없겠지.
그래도 다행인 건 이미 가족들이 나의 채식 실천과 친환경적인 삶의 방향을 다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직업까지 바꿨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긴 하지.
첫 식사는 채식 위주의 한정식으로 무난하게 시작했다. 시부모님은 생선이 들어간 정식을, 자식들은 계란이 들어간 비빔밥을 먹었다. 완벽한 비건은 아니었지만 밑반찬이 모두 나물 가득이라 마음이 편했던 식사였다.
이때부터 나의 다회용 컵 들고 다니기가 시작되었다. 남편, 아이와 함께 하는 일상에서는 익숙한 습관이지만 시댁 식구들은 나의 실천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접한 게 처음이었다. 모든 식당에서 종이컵을 반납하고 다회용 컵을 꺼냈다.
아이들은 종이컵이 나오면 바로 손이 가기 때문에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종이컵을 재빠르게 시선에서 없애는 치밀하고 민첩한 행동이 필요했다.
딱 한 번 고기를 먹으러 간 적이 있었다. 구워 먹는 곳이었는데 1인분 적게 주문하고 반찬과 된장찌개로 식사를 마쳤다. 그건 괜찮았다.
안 괜찮은 건 컵이었다. 종이컵 대신 다회용 컵을 식구들 앞에 하나씩 놓아주는데 다섯 살 우리 아이와 여섯 살 조카의 실랑이가 시작되었다. 컵 색깔이 두 가지였는데 서로 핑크색을 갖겠다고 했다. 핑크색 컵이 두 개 이상이었으므로 각자에게 나누어주면 해결될 줄 알았지만 둘 다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여섯 살 형아는 본인이 컵을 나누어주고 싶어 했고 다섯 살 동생은 형이 나누어준 핑크색 컵은 싫고 자신이 컵을 꺼내고 싶어 했다.
얘들아. 뭣이 중헌디!
라고 외치고 싶었다.
아침 조식 뷔페. 맛은 별로였지만 내가 먹을 수 있는
것들을 골라 먹을 수 있어 차라리 편했다.
테이블은 가족별로 나누어 앉아 컵을 나눠줄 타이밍을 놓쳤다. 나와 남편, 우리 아이만 다회용 컵을 사용했다.
비가 오는 오후엔 다 같이 전시를 보러 갔다. 미디어 아트 전시관 안에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는 패키지 티켓으로 구매했다. 비건이 아닌 건 알지만 나만 안 먹기엔 너무 당이 떨어지는 듯해서 못 참고 먹었다. 일회용기에 줄까 봐 불안했는데 다회용기라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식당 밥만 계속 먹으니 소화도 안되고 부담스러워 다 같이 먹으려고 밥도 하고 미역국도 끓였다. 요리는 내가 아닌 남편이 주도했다. 남편의 주특기인 황태 미역국은 언제나 그렇듯 인기 만점이었다.
비건 만두, 감자전, 누룽지, 고구마도 모두가 다 같이 잘 먹었다. 가져가기도 편하고 먹으면 속이 편한 누룽지는 언제나 여행 필수품이다.
우리 부부의 치밀한 계획이었다. 우리가 식재료와 간식을 준비해야 첨가물이 덜 들어간 채식 중심의 식사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조카들은 우리 아이보다 속세의 맛에 일찍 눈을 떴기에 방심할 수 없었다.
물은 끓여마셨다. 정수기나 생수보다 깨끗하고 미세 플라스틱이 없어 안심인 옥수수차. 티백이 아닌 말린 옥수수알 몇 알 넣고 끓이면 되니 이보다 마음 편한 제로웨이스트가 없다.
“설거지하려고 온 거 아니지?”
주방에서 분주한 내게 농담을 던지는 시언니. 가부장적인 마인드 한 명도 없는 집 안에서 아무도 안 시켰는데 설거지하는 며느리. 요리는 모두 남편이 맡아서 했고 아이 챙기는 사이 시어머니는 소리 소문 없이 두 번의 설거지를 담당하셨다.
난 정말 며느리라서 설거지한 게 아니라 누가 일회용품 쓸까 봐 삼베 수세미와 캠핑용 스테인리스 그릇까지 챙겨간 것뿐이다.
발왕산 케이블카도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여주에 들러 배도 타고 알차고 즐거웠던 여행이었다. 매 순간 빠짐없이 컵을 들이밀고 텀블러에 커피를 사는 나를 보고 시아버지는 “우리 며느리 정말 대단하다."라고 하셨다. 가끔 집에서 비닐 쓸 때 며느리 얼굴이 떠올라 신경이 쓰이신다고 했다.
마지막 용기내 챌린지는 시부모님의 텃밭이었다.
“며느리 담을 거 있니?”
“네!! 있어요!!!”
여행용품 담았던 큰 천 주머니를 바로 비워 옥상에 들고 올라가 가지와 고추를 담았다. 싱그러운 채소도, 비닐 하나 없는 나의 주머니도 어찌나 좋던지.
그렇게 시댁 가족 여행에서 채식주의 제로웨이스터 며느리는 적당히 타협하며 잘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