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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Jul 22. 2024

비만 오면 생각나는 기후 재난 트라우마




하루 종일 비가 세차게 내렸다. 



육아를 도와주러 일주일에 두어 번 집에 친정 엄마가 오시는데 마침 그날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지극히 일상의 날들 중 하나지만 아침부터 내내 걱정했다. 비가 내렸기 때문이다. 매일 같이 내일의 날씨를 체크하고 혹시 몰라 우산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 나날들. 장마가 찾아온 것이다. 


하루 종일 친정과 우리 동네의 날씨를 검색하고 네이버 지도의 cctv를 찾아보며 실시간 현황을 살폈다.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아직 출발하지 마시라고 일러두었다. 일기 예보엔 오후 3시에 시간당 강수량이 35mm까지 많아진다고 나와있었다. 자동차가 침수될 수도 있는 양이라고 했다. 오시지 말라고 해야겠다 싶었는데 갑자기 4시에 비가 말끔하게 그쳐버렸다. 전전긍긍하며 신경 쓴 게 허무할 정도로 하늘이 맑게 개었다. 내 감정 기복만큼이나 요동치는 날씨의 기복을 어찌하오리까.


매장을 혼자 보는 날이라 오후 6시에 퇴근했다. 비가 그치고 오신 외할머니 덕분에 우리 아이는 유치원에 혼자 남아있지 않을 수 있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아까는 비가 너무 세차게 내렸다고, 이제라도 그쳐 다행이라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와 나누는 대화 속엔 날씨에 대한 걱정과 관심이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다시 예전 일화를 꺼내지 않아도 그날의 기억 때문에 비 오는 날에 대해 서로가 갖는 긴장감을 엄마도 알고 나도 알았다.





기후 재난 트라우마가 생긴 이유



2년 전 8월 8일. 그날도 엄마는 육아를 도와주러 우리 집에 왔었고 비가 내렸다. 세 살 아이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녁을 먹고 치우고 목욕 시키는 매일의 지상 과제를 해치우느라 창밖 날씨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창문에 물방울이 맺히는 걸로 보아 비가 오는 것 같았지만 얼마나 오는지 알아채지도 못했다.


엄마는 항상 저녁 7시 반에서 8시 사이에 우리 집에서 나서 본인 집으로 돌아가신다. 버스 타고 지하철로 갈아타는 엄마의 여정은 언제나 일정했고 비가 오길래 우산을 챙겨드렸다. 엄마가 집에 무사히 가지 못할 거라는 조금의 우려도,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 엄마는 늘 내게 집에 잘 돌아왔다는 카톡 메시지 하나를 남기곤 했으니까. 


엄마를 보내고 아이를 빨리 재우는 일에 내 모든 에너지를 쏟아냈다. 아이가 잠들어야 하루를 마무리하고 쉴 수 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열과 성을 다해 동화도 들려주고 자는 척도 해가며 아이를 재웠다. 이제야 가져보는 나만의 시간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이 방 문을 닫고 나오는데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평소 사소한 일로 자주 전화하는 엄마였다. 걸레를 빨고 나서 못 널고 오면 그게 생각나 다시 전화해 빨래 건조대에 잘 널라고 일러두는 엄마가 또 무슨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려나 싶어 전화를 받았는데 목소리가 달랐다.


엄마는 다급했고 잔뜩 겁을 먹은 목소리였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지하철역 밖을 빠져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도 같이 패닉 상태에 빠졌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엄마한테 물었다. 어디 피할 곳이 없는지,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대피하는지 살피라고 말했다. 엄마는 잠시 후 다시 전화한다고 말하고 끊었다.


혼란스러워진 나는 뉴스를 틀었다. 비가 어디에 얼마나 오고 있는지, 엄마가 사는 동네에 대한 중계는 없는지 찾아봤다. 동시에 네이버 실시간 채팅창을 통해 얼마나 침수가 된 건지 파악했다. 달리고 있는 버스 안에 물이 들어차는 영상을 보게 되었고 걱정은 극에 달했다. 


다시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전화를 받은 엄마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다. 겨우 지하철역 밖으로 나와 상가 건물 1층 은행 앞에 서있다고 했다. 물살이 너무 세서 도저히 집까지 걸어 올라갈 수 없고 다른 곳으로 대피할 곳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은행조차 ATM 기기가 있어서 침수되면 감전의 위험이 있어 계속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어떻게 하라고 해야 할지 몰라 애가 탔다. 


다시 전화를 끊었고 119에 전화를 했다가 남편에게 전화했다가 다시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뉴스와 실시간 채팅창과 전화를 오가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난 발만 동동 굴렸다.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엄마는 받지 않았다. 이대로 엄마가 어떻게 될 수 있다는 상상을 했다. 


스무 번쯤 걸었을까 서른 번쯤 걸었을까. 11시가 다 된 시간에 엄마는 전화를 받았다. 다급함은 여전했지만 조금은 안도한 듯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나가는 청년에게 지하철역까지만 함께 가달라고 부탁해 역사 안에서 잠시 몸을 피하신 엄마는 물살이 조금 잦아들었을 때 집 반대 방향 출구로 나와 먼 길을 돌아 집으로 무사히 들어가셨다고 했다. 


그날 엄마네 동네엔 시간당 140mm의 역대급 폭우가 내렸다.







태풍의 위력을 처음으로 느꼈던 날



이보다 4년 전, 아직 우리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지도 생기지도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그 시기에 왜 하필 오키나와 여행을 계획했던 건지 모르겠지만 이미 모든 티켓의 예매가 끝나고 떠나기 전 날 태풍 소식을 듣게 되었다. 여태껏 태풍의 피해를 크게 보며 산 적이 없어서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는데 역대급 태풍이 오키나와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했다.


스노쿨링 예약을 취소한 후 여행 자체를 취소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비행기 티켓과 숙소만 취소하면 되는데 이미 세워놓은 계획도, 돈도 모두 아까웠다. 괜찮지 않을까. 태풍은 언제나 여름에 왔던 거니까. 살아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여러 내적 갈등 끝에 앱으로 태풍의 경로를 확인하며 오키나와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태풍이 점점 가까워지는 걸 느끼며 여행을 시작했다. 참 예쁜 섬이었지만 딱 반만큼 즐길 수 있었다. 미술관은 너무 예뻤지만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절벽 앞 절경은 아름다웠지만 바람이 거세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오션뷰 숙소에서 무섭게 파도치는 걸 바라봐야 했다. 차를 주차하고 맛집에 들어가려는데 바람에 우산이 뒤집어졌고 정말 날아가는 줄 알았다.


여행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갔고 태풍도 절정에 다다랐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의사소통이 잘못되었는지 렌터카 회사에선 숙소까지 데려다줄 수 없다고 했고 점점 심해지는 비바람에 택시도 잡히지 않았다. 울고 싶었다. 비 맞아가며 한참을 헤매다 겨우 택시를 잡아탔다.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며 차가 잠시 멈춰 선 그 순간 바람에 택시가 좌우로 흔들렸고 폭우로 잠시 앞이 보이지 않았다. 너무 과도하게 겁을 집어먹은 탓이었을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대로 물에 잠기는 건 아니겠지. 여기서 이렇게 내 인생 끝나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죽지 않고 숙소에 돌아와 안심했지만 밤새 강풍 소리를 bgm 삼아 들으며 잠을 설쳐야 했다.







더욱더 현실이 되어가는 중



환경에 대한 관심은 어느 날 갑자기 번개 치듯 시작된 것처럼 보였지만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전에 보고 듣고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엮여 수면 위로 올라왔다. 여러 권의 책,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와 영화, 뉴스 등 다양했지만 가장 강력한 건 직접 경험한 날씨의 위협이었다. 그것들이 몇 차례 이어지자 약간의 트라우마가 되었고 날씨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계절을 거듭할수록 변화를 체감하게 되었다. 앞으로 더 갑작스러워질 테고 극단적으로 변해갈 거란 걸 예감하게 되었다. 슬펐다. 예견된 미래 앞에 뭘 할 수 있을까. 뭘 해야 할까.


오직 바라는 건 이 약한 트라우마가 낫는 일이 아니다. 아이가 살아가며 겪게 될 날씨들은 이보다 더 급작스럽고 강력하고 극단적일 텐데 내가 뭘 해줄 수 있을까. 당면한 현실 앞에 두려움만 커질 뿐이다.


그렇더라도 멍하니 바라만 볼 수는 없다. 비행기에서 추락하더라도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내가 어떻게 되더라도 내 아이는 꼭 끌어안아 살리고 싶은 간절함이다. 모든 부모가 그러하지 않겠나.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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