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현은 제일 친한 친구이자 유일한 친구였던 은중을 엄마가 딸인 자신보다 예뻐한다고 믿었다. 은중은 상현에게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냐고 물었다. 은중은 어린아이가 그렇다고 믿으면 세상은 그런 것이 되는 거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가 상현이라는 캐릭터의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게 아닐까 싶다. 상연은 분명 불행하고 비참했지만 같은 일이 은중에게 일어났다면, 이야기는 아마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둘은 가장 친밀하면서도 멀었다. 한 번도 서로를 이긴 적이 없고 결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은중의 눈엔 상현이 완벽해 보였지만, 상현의 눈에 비친 은중은 반대였다. 모두가 그녀를 좋아하고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이 바로 은중이었다. 둘은 많은 걸 공유하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둘의 결정적인 차이는 기질이 아니라 결핍이었다. 가난한 집에서 자란 은중에게도 결핍은 있었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극복하지 못할 정도의 결핍감은 아니었다. 모든 걸 다 가진 듯 보였으나, 마음이 가난했던 상연의 결핍감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답답하고 안쓰럽게 만들었다. 그녀가 비참할 수밖에 없었던 건지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든 건지 알 수 없는 묘한 경계선의 이야기들은 참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결핍은 사람에게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끼친다.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라는 책에서 결핍은 피해 의식과 상처를 만들어낼 뿐 아니라,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내용이 나온다. 가난이 지속되면 모든 소비를 기회비용으로만 여기게 되고 그로 인해 제대로 된 선택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세상은 자꾸만 결핍을 만들어내 부와 가짜 풍요를 갈망하게 만든다.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만들어진 결핍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돌아가려면 결핍이 있어야 한다. 이 체제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결핍을 만들어내도록 설계되었다.”
- 자연은 계산하지 않는다
20대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서울에서 우리 집은 몇 번째로 가난할까. 가장 가난한 사람이 1번이라면 아무래도 우리 집은 뒤쪽보다는 앞쪽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했다. 청소년기에 자주 이사를 다녔고 빌라로 들어가는 작은 골목에 들어설 때마다 내가 사는 환경에 대해 생각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무조건 나를 위로할 음악을 들으며 걸었다. 10대를 거쳐 20대까지 결핍은 일정 부분 나를 괴롭혔다. 결핍을 숨기고 살았던 10대 때 나보다 잘 사는 친구가 나를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내가 내 결핍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면 친구는 더 이상 나를 부러워하지 않았을까. 내겐 그 친구에게 없는 것이 있었고 그 친구에겐 내게 없는 것이 있었겠지.
스스로를 조금 더 삐뚤어져도 된다고 여겼던 상연은 경주마처럼 달려 사회적 성공을 거두게 되지만, 그녀는 결국 외로웠고 곁에 아무도 없었다. 은중을 다시 찾았을 때가 되어서야 그 모든 결핍감을 내려놓게 되었을까.
결핍은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요즘 아이들은 풍요가 넘쳐 결핍이 없는 게 문제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결핍은 정말 사라진 걸까. 결핍과 풍요의 균형이 잘 맞는다고 할 수 있을까. 물질의 풍요와 마음의 풍요는 다른 것인데 과연 둘 다 넘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른들은 어떨까. 풍요롭기만 할까.
중요한 건 결핍을 다루는 태도인 것 같다. 살면서 결핍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 각자만의 사정이 있는 거지. 적어도 어린아이가 세상을 괜찮은 곳이라 믿고 나아가려면 사랑에 있어서 만큼은 결핍을 주어서는 안된다. 결핍감의 필터로 세상을 잘못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것이 평생 동안 스스로를 괴롭히는 굴레가 된다. 부족함을 알고 극복해나가는 법,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는 법,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법은 과도한 결핍감이 아닌 건강한 결핍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바탕엔 무조건 사랑이 있어야 한다. 내가 못나도 잘나도 상관없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야 한다. 부모만이 줄 수 있는 사랑.
이제와 보면 그렇게까지 결핍감을 느낄 필요도, 숨길 필요도 없었는데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 때를 과거로 회상할 여유가 생겼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 그 때가 희미해진 걸 보면 아주 극복 못할 정도의 결핍감은 아니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