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Lee의 좌충우돌 미국 수의사 도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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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학에 있어서 마취는 정말 매우매우 중요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은 치료할 때, 예를 들어 상처 부위를 좀 꼬맨다고 하면 의사 선생님이
"좀 아파요~ 참으실 수 있으시죠?"
라고 하면 어린 아이가 아닌 이상 아파도 가만히 잘 있는다. 의사 선생님이 나를 치료하고 있다는 것을 아니까. 하지만 동물들은, 설령 내가 치료하기 위해서 주사 하나 놓으려 해도
(만약 동물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야 이 수의사 나쁜놈아! 내 몸에 뭐 하는거냐. 이거놔라 다 죽여버릴거다!!"
라고 발광을 하며 물거나 (개), 할퀴거나 (고양이), 발 (말)로 찬다. 간단한 처치의 경우에는 물리적으로 잡고 하지만, 아픔이 동반되는 경우에는 국소 또는 수면마취를 활용한다.
하지만 수의학에서는 아픔이 동반되지 않는 경우에도 마취를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CT나 MRI를 찍기 위해 일정시간 동안 동물이 가만히 있어야 할 때 (그래서 가격도 훨씬 비싸다), 혹은 로데오용 소 또는 야생동물과 같이 사람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경우에는 마취를 한 후 적절한 처치를 한다. 어쨋든 수의학에서 마취는 정말 없어서는 안될 필수요소이며, 마취를 적절하게 할 줄 알아야 동물과 사람 모두가 안전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알 듯이, 과도한 마취약은 동물의 몸에 부담을 줄 수 있으며, 많은 종류의 마취약은 향정신성 의약품으로 분류되어 엄격한 통제하에 쓰이기 때문에 사용하기 전에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
마취과에 있을 때에는 개∙고양이, 말, 소 등 병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마취 케이스에 대해서 관여를 한다. 마취과를 돌고 있을 때 말 외과로부터 인대 손상 수술에 대한 마취를 의뢰 받은 적이 있다. 케이스를 의뢰 받으면 마취과에서는 닥터와 담당 학생이 어떤 마취제를 얼마나 쓰고, 어떻게 회복을 시킬지 논의 후 마취를 진행한다.
수술 당일 말의 마취 과정은 순조롭게 이루어 졌고 수술도 잘 끝났다. 이제 잠들어 있는 말을 잘 회복시켜 깨우기만 하면 일이 끝나는 평온한 날이었다. 평소에 아무리 온순한 동물이어도 회복 과정 중에는 마취에 취해서 공격적인 성향이 표출될 수 있어 훨씬 조심해야 하기 때문에,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회복실은 말이 마취에서 깰 때 다치지 않도록 사방이 푹신한 매트로 이루어져 있는 아파트 거실 정도 되는 크기의 방이었는데, 수술실에서 회복실까지 옮길 때에는 말을 엄청 큰 바퀴 달린 들것에 실어서 옮겨야 했다. 그렇게 회복실로 이동하고 있는 와중에……
말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통의 경우에는 회복실에 눕힐 때까지 미동도 없기 때문에, 나와 동료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바로 느꼈다. 마취의 시작부터 회복까지 전 과정은 마취팀장이 전담을 하는데, 마취팀장도 말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Get the 'fucking' horse down on the recovery room, now!! (당장 말을 회복실 바닥에 내려)"
라고 소리를 질렀다.
(미국 수의대에서 로테이션을 도는 동안 누가 소리를 지르는 것은 이날 처음 봤다)
8명이 달려 들어서 조금씩 움직이는 말을 최대한 빨리 회복실에 눕히고, 마취팀장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회복실 밖으로 나갔다. 회복과정 중에 갑작스럽게 깬 말은 바닥에 옆으로 누운 채 발을 버둥거리고 목을 심하게 움직이면서 마치 발작을 하는 증세를 보였다. 집채만한 말이 긴 다리를 허우적거리자 사방 2m 이내가 말다리의 사정권이 되었다. 혹여나 돌덩이 같은 발굽에 스치기만 해도 골절상을 입을 수 있다. 갑작스런 응급상황에 나를 포함한 수의대생들은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안 떠오른채 발이 그냥 땅바닥에 붙어서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사실 그 상황에서는 참견하는 것보다는 가만히 있는게 나을 수도 있지만)
중학교 때 '나루토'라는 닌자 애니메이션을 즐겨 봤는데, 거기 보면 하급닌자가 싸움터에서 단지 그 '상황'이 주는 압도감에 눌려 발이 떨어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마치 그 상황처럼 팀장급들은 분주히 protocol에 따른 응급처치를 하기 위해 약을 뽑고 산소 호흡 장치를 연결하기 위해 뛰어다니는데, 나와 다른 수의대생들은 그냥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가 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안 났다.
말이 발작을 일으키는 상황에서도 마취팀장은 말의 목을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목쪽에 달라붙어 있었다. 말의 목에는 기도를 확보하고 있는 튜브, 그리고 혈액으로 주사제를 투입할 수 있는 카데터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튜브가 기도에서 빠지면 말은 호흡을 못해 죽을 수 있으며, 카데터는 응급약물들을 혈액으로투입하기 위한 일종의 긴 주사바늘이다)
말외과 레지던트는 말을 진정시키기 위한 주사 마취제를 뽑기 위해 내 앞에 있던 응급카트로 뛰어 왔다. 응급카트는 향정신성 의약품들이 가득 들어있기 때문에 열쇠로 잠겨 있었다. 그런데 레지던트도 당황했는지, 잠겨 있는 응급카트 서랍을 미친듯이 열려고 힘으로 당기고 있었다. 당황한 레지던트는 갑자기 우리쪽을 보면서, 평소에는 그렇게 친절하고 착할 수 없던 사람이
"Somebody go to the 'fucking' pharmacy and get the 'fucking' ketamine! (누가 당장 병원내 약국에 가서 케타민을 가져와!)"
라고 소리를 질렀다. Pharmacy는 회복실에서 조금 떨어진 병원내 약국이며, ketamine은 말을 진정시키는 마취제이다. 나는 fucking이라는 말만 귀에 들어오고 뭐라고 소리 지르는지 잘 듣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 "Pardon?"이라 하면 죽일 것 같았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과 그냥 최대한 가만히 있었다. 이래서 응급 CPR을 배울 때
"거기 파란색 옷 입은 아저시 119에 전화해주세요!" 라고 정확히 지목을 하나 보다.
말귀를 알아들은 옆에 있던 수의간호사가, 마치 100m 달리기를 하듯이 약국으로 내달렸다. 다행히 그 순간 소란을 듣고 온 다른 마취팀 사람이 응급카트 키를 열고 마취제를 뽑아서 말에 주입을 했다. 약을 주입하자 말은 발작을 일단 멈추었고, 우리는 말을 일으키기 위하여 말의 고삐, 그리고 꼬리를 각각 줄로 묶어 양쪽 도르래에 연결하여 일으켜 세우려 했다. 회복실 안에는 '상급닌자'들인 팀장과 교수들만 들어가서 말이 일어설 수 있도록 벽쪽으로 밀었다.
나머지 '하급닌자'들은 회복실 밖에서 줄다리기 하듯이 도르래에 연결된 줄을 당겼다. 마냥 줄을 당기기만 하면 말의 목이 꺾이기 때문에 적당히 보면서 말을 일으켰다. 하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는 말은 그 육중한 몸을 술에 취한 듯 회복실을 좌우로 비틀비틀 거리면서 휘젓고 다녔다. 말이 휘청거릴 때마다 상급닌자들은 말을 피하기 위해 알아서 각자 사각지대로 몸을 피했다. 행여나 휘청거리는 말이 넘어져 그 밑에 깔리거나, 말에 밀려 회복실 벽쪽에 몰렸다가는 중상을 입을 것 같았다. (평균적인 성인마는 무게가 500kg 정도 된다)
상급닌자들이 추가 수액을 연결하고 응급처치를 한 덕분에, 미친 것 같던 말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왔던 말 내과, 외과 인력과 마취팀 상급닌자들은 자기 업무로 복귀했다. 하급닌자인 나로서는 그들이 참 대단해 보였으며, 휘청거리던 순간에도 말의 목에 있던 필수장치들을 사수하기 위해 붙어있던 마취팀장이 대단해 보였다. 그 분은 쉰 정도 된 아줌마인데, 평소에도 침착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오늘에서야 그 진가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새삼 경험과 Training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수 있었다. 그 응급상황에서는 protocol을 읽어가면서 어떤 약물, 장비를 써야하는지 하나씩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그냥 몸이 기억하는 처치들을 당황하지 말고 동시다발적으로 해야하는 것이다. 상황이 일단락 된 후 하급 닌자들끼리는
"왜 우리한테 소리지르고 그러는거야ㅠㅠ"
라고 툴툴거리면서 집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