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크리스마스
그 해에는 유독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지 않았다. 거리에는 캐럴이 울리지 않았고, 장식도 적었다. 아니, 어쩌면 그저 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느지막이 일어나 칠면조 대신 닭볶음탕을 시켜 먹었다. 간만에 청소를 하고 낮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아르바이트를 갈 시간이었다. 나는 항상 크리스마스와 거리가 멀었다.
그해 크리스마스에는 카페에서 파란 유니폼을 입고 토피넛 라테를 탔다. 남들 노는 날 일하는 것도 싫은데 손님까지 많으면 진짜 싫겠다. 툴툴거리며 출근한 것이 무색할 만큼 카페 안은 적막 했다. 하긴, 누가 크리스마스에 이런 동네에 오나 싶었다. 다들 연남동이나 강남이나, 뭐 예쁘고 비싼 곳 가겠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후로 가장 매장이 텅 빈 날이었다. 예쁜 녹색 스웨터를 입으신 사장님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출근할 때부터 매장 안에는 ‘그’ 할아버지가 보였다. 역 근처를 돌아다니며 폐지를 줍는 분이신데, 종종 매장에 들러 물을 얻어 드시곤 했다. 본인 입으로 “나는 정신병자여”라고 말씀하셨는데 진짜 인지는 모르겠다. 돈을 쓰지 않으면서 일을 시키는 손님은 사장님도 아르바이트생도 반기지 않았다. 전 타임 아르바이트생은 저 할아버지가 자꾸 술을 숨겨오는데, 소란을 피우면 경찰에 신고하라고 일러주고는 서둘러 퇴근했다.
지난번 물을 얻어 드시면서 “다음에 올 땐 커피 사 먹을게. 미안해요.”라고 하셨는데, 그 날은 진짜 커피를 드시고 계셨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손에 쥔 채 혼자 떠들고 계셨다. 횡설수설하는 말들 사이로 ‘메리 크리스마스’가 들렸다. 할아버지는 혼자 두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고, 주변은 결계라도 친 것처럼 비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흘끗흘끗 할아버지를 봤다. 나는 카운터 뒤에 숨어서 최대한 할아버지를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눈이 마주치면 귀찮아질 것이 분명했다. 매장이 텅 빈 데엔 할아버지도 한몫한 것 같았다.
한참을 떠들던 할아버지가 나가고 다시 매장은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얼마 가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다시 매장에 들어오더니 또 커피를 한 잔 시키셨다. 가장 싼 커피를 주라고 하셨는데, 가장 싼 아메리카노가 한잔에 3200원이었다. 두 잔을 드셨으니 커피에 6400원을 쓰신 셈이다.
할아버지는 어디서 양말을 가져와서는 매장 트리에 걸어 놓았다. 신던 양말인지 새 양말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복슬복슬한 빨간 줄무늬 양말은 제법 크리스마스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양말에 돈도 조금 넣으신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양말에 대고 계속 기도를 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할아버지가 간 뒤 양말을 확인해 볼까 했는데, 괜히 만지기 싫어서 관뒀다. 신던 양말이면 어떡해.
할아버지는 또 한참을 떠들었다. 외출하고 돌아온 사장님은 할아버지를 보고 인상을 썼다. “아저씨, 자꾸 떠들면 앞으로는 커피 안 팔 거예요.” 친절한 사장님이 손님에게 ‘아저씨’라고 부르는 게, 한 잔이라도 더 파는 게 목적인 사장님이 손님을 쫓는 게 낯설었다. 사장님은 “커피 팔지 말았어야지”라며 내게도 한소리를 했다. 사장님이 오시고 얼마 안 돼서 할아버지는 가셨다. 이번에는 아주 가셨다. 매장은 다시 조용해졌다.
왜 그날은 커피를 두 잔이나 드셨을까. 평소엔 물만 드시고 가시면서. 차라리 계속 앉아 계시지. 요즘엔 한 잔 시키고 몇 시간씩 앉아있는 사람들 정말 많은데. 양말엔 무슨 소원을 비셨을까. 할아버지에게도 그 날은 성탄절이었을까. 나의 친절은 커피를 정량보다 많이 드리는 것뿐이었다. 정작 계산하는 순간에는 손이 닿을까 걱정했고, 그런 내가 몹시 수치스러웠다.
겨울이 깊어지고 캐럴이 들리기 시작할 때쯤이면, 평소에는 전혀 생각나지 않던 그 할아버지와 그 양말이 떠오른다. 주름진 검은손과 빨갛고 복슬복슬하던 양말. 늦었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평소보다 들뜬 하루였기를.
+) 양말에서는 2000원이 나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