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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엉 Jan 17. 2021

막장드라마의 치명적인 매력

정신을 차려보니 사흘 만에 <펜트하우스>를 완주했다

※ 스포 주의


"부검 전까지는 죽은 게 아니다."

‘순옥드(김순옥 작가가 쓴 드라마)’를 이것보다 잘 표현한 문장이 있을까. <펜트하우스> 19화가 끝난 뒤 인터넷 커뮤니티는 뒤집혔다. 사이다 행보를 보일 줄 알았던 심수련의 죽음 탓이다. 과연 심수련은 죽은 게 맞을까? 시즌 2에서 기억상실증 상태로 발견되거나, 어릴 적 헤어졌던 심수련의 쌍둥이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심수련이 눈 밑에 점 하나를 찍고 돌아오고, 주단태는 그런 심수련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해도 시청자는 그러려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이처럼 개연성 없고 황당한 전개를 자랑하는 드라마를 우리는 ‘막장’이라고 부른다.


그동안 막장 드라마는 드라마 산업의 발전을 저해하고, 대중문화에 악영향을 미치는 ‘저질’ 취급을 받아왔다. 그러나 막장 드라마를 단순히 수준 낮은 드라마로 보기엔 아쉽다. 오히려 막장 드라마는 한국인의 특성과 욕망을 정확히 간파한 하나의 ‘장르’로 봐야 한다.


막장드라마의 장르성

막장 드라마는 대부분 '가족극'이다. <펜트하우스> 속 자식에 대한 과도한 집착, 고부갈등 등은 쉽게 한국인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이혼한 자식에겐 상속하지 않겠다는 천서진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면모 역시 한국적이다. 또한, 막장 드라마에 빠지면 아쉬운 ‘재벌’ 역시 한국 경제구조에서만 독특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막장 드라마 속 재벌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서민 시청자를 분노케 한다.


<펜트하우스>는 이처럼 전통적인 소재에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인 ‘부동산’과 ‘입시’를 덧붙였다. 하늘을 뚫고 올라갈 듯 높은 헤라 팰리스, 그중에서도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 집값을 걱정하며 사체를 유기하는 모습, 자식을 좋은 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 입시 비리를 저지르고 살인까지 하는 모습 등은 과장되어 있지만 지극히 현실적이다.

"사는 집이 그 사람 인격이고 지위고 권력인 세상이잖아요"

막장 드라마의 마라맛 전개 역시 대중들의 취향을 관통한다. ‘고구마’와 ‘사이다’가 번갈아 나오며 시청자들을 쪼인다. 신분 상승 욕구로 가득 찬 인물들이 성공하고 실패하는 모습이 빠르게 반복되며 말초적인 흥미를 자극한다. ‘화병’이 고유명사로 미국 의학계에 등재될 정도로, 한국인들은 화가 가득하다. 드라마 시청은 이런 화를 쉽게 표출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막장 드라마에는 불합리한 상황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누군가의 음모로 위기에 처한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하며 “저 나쁜 X!”라고 마음껏 욕하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이처럼 한국적인 소재, 자극적인 전개는 언젠가 국어 교과서에서 배웠던 민담과 조선 후기 서민문화와 비슷하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필연성이 전제되지 않던, 오로지 ‘재미’를 위해 꾸며낸 이야기들. 쉽고 익숙한 언어로 상류층을 향한 분노, 현실 풍자 등을 솔직하게 쏟아 내던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심수련의 ‘똥물 복수’는 전래동화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준다.


'좋은' 드라마는 아니다. 하지만...

<펜트하우스>를 '좋은' 드라마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민설아에게 쏟아지던 불행 포르노 수준의 수위 높은 폭력은 눈살을 찌푸려지게 하고, 재벌가 자녀들이 모두 성악에 목맨다는 설정에는 헛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펜트하우스>는 보지도 않고 평가절하할 드라마는 아니다. 20화 내내 새로운 갈등을 끌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캐릭터들의 입체성과 관계성 역시 돋보인다. 권력욕에 눈이 먼 듯한 천서진은 애정 결핍이고, 학교폭력에 앞장서던 제니는 “밥은 먹었냐”며 로나를 챙긴다. 절대선일 것만 같았던 오윤희가 욕망에 사로잡히는 모습은 이 드라마가 단순한 권선징악은 아님을 보여준다. 배우들의 호연 역시 이 드라마를 볼 이유다.


‘막장’은 원래 탄광에서 막다른 곳을 의미하는 말이다. 막장드라마는 더 내려갈 곳이 없다. 시청자가 사랑하는 막장드라마의 장르적 특성은 남기되, 개연성과 자극성에 대한 고민을 덧붙여간다면 조금씩 위로 올라올 수 있지 않을까. 남은 <펜트하우스>의 시즌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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