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JIN 잡문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N Nov 16. 2023

경험 많은 JIN의 10억을 거절한 금요일

#2028년 11월 10일 나는



2028년 11월 10일 마흔일곱. 나는 예쁘다도 럭셔리하다도 팔자 좋다도 아닌 내가 갖고 싶던 우아하고 멋지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여자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오늘 아침은 연신 울려대는 메시지 진동 소리에 잠이 깼다. 메시지 내용은 짧지만 간절했다. 지난 5년간 국내외를 넘나들며 쌓은 나의 경험들을 담은 4주간의 강연과 짧은 기고글 몇 편을 원한다고 했다. 꼭 나를 원한다고 했다. 그들이 대가로 부른 돈은 1억. 그동안 적립한 나의 업무, 여행, 취향에 대한 경험들이 복리처럼 불어나 나의 시간의 가치가 매일 상한가를 기록하고 있다. 결정에 조바심을 내고 싶지 않았다. 답장을 기다리며 애를 태우는 것은 이제 내가 아니라 일을 의뢰한 그들이다. 당장 세상 가장 소중한 나의 아들의 등교가 더 중요하고 급한 탓에 아이의 등교 이후로 답변을 미뤘다. 


어느새 중2가 된 아들은 말수가 줄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다정하다. 아침을 먹으며 오늘 학교 과제로 제출할 "가장 존경하는 사람"에 엄마를 썼다고 말해준다. 역시나 아이는 부모의 잔소리가 아닌 열심히 사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큰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내 키를 넘어선 아들은 허리를 굽혀 나를 안아줬다. 애정이 뚝뚝 흐르는 엄마 사랑해요와 손 하트는 없어졌지만 아이의 다정한 포옹이 그 말을 대신한다. 남편까지 출근을 하고 나니 온 집안이 고요해졌다. 


온 집안을 가득 채우는 보랏빛


날은 맑았고, 하늘은 정말이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거실 통창으로 보이는 하늘을 한 폭 떼어 내 방에 걸고 싶었다. 하늘에 취해 감상에 빠져 있는 동안 집안일을 해주시는 아주머니께서 와주셨다. 어제 퇴근하실 때 부탁했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리스를 품 한가득 사가지고 오셨다. 가장 좋아하는 큰 화병에 무심한 듯 시크하게 꽃을 꽂았다. 온 집안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보라색 잉크가 번지는 느낌이 들었다. 밀린 집안일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멋진 빌딩 숲과 잘 자란 나무들이 어우러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나의 서재로 들어와 앉았다. 온 방이 내가 좋아하는 책과 그림들로 가득하다. 책상 위에는 보라색 노트와 사각거리는 지우개 연필, 그리고 나의 분신 같은 노트북만이 올려져 있다. 5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하여 찾아낸 나의 취향에 꼭 맞게 블랜딩 한 스페셜티 한잔을 마신다. 아들이 요즘 좋아하는 음악과 나의 취향이 적절히 섞인 플레이리스트의 음악을 플레이했다.  


커피 한 모금에 나를 정돈하고 아침에 받은 제안을 다시 꼼꼼히 검토해 보았지만 마음이 영 가지 않았다. 원하던 프로젝트도 아니고,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도 아니었다. 며칠만 투자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나의 소중한 시간을 1억과 바꾸고 싶지 않았다. 더 고민하지 않고 거절의 메일을 보냈다. 



나를 충만하게 하는 나의 직업들

나는 총 3가지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 가장 오래된 밥벌이인 프리랜서 카피라이터의 삶과 몇 년 전부터 인스타에 인기를 끌며 1년 치 예약이 이미 풀로 차있는 컨셉하우스의 주인장, 그리고 마음이 힘든 사람들에게 메일로 위로와 응원을 전하는 편지테라피스트의 일이 그것이다.  


프리랜서 카피라이터 직업은 내가 가장 오래 한 직업이자 나의 가장 애증 어린 직업이기도 하다. 오늘도 글로벌 가구 기업의 브랜드 스토리 작업의 의뢰를 받았다. 브랜드 스토리 작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업이라 흔쾌히 수락을 했다. 감사와 기대를 표하는 답메일이 1분 만에 도착했다. 나의 결정을 꽤나 간절히 기다린 듯하다.  그동안 가족과 함께 다녔던 세계 곳곳의 여행 기억, 그리고 그곳에서 보았던 건축물과 가구들에 대한 경험으로 이번 프로젝트를 즐겁게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언제고 세계 곳곳에서 내가 브랜드 스토리를 작업한 가구들을 만나게 되면 아들에게 또 한 번 자랑스러운 엄마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 업무로 컨셉하우스의 내년치 예약 현황을 확인했다. 나의 컨셉하우스의 이름은 hide. 곳곳에 클래식한 디자인의 가구들과 소품,  건강한 먹거리에 대한 생각이 담긴 유기농 웰컴푸드, 그리고 쉼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정원까지. 나의 취향으로 가득 채운 hide는 내년 예약도 연말까지 5분이 안되어 꽉 차버렸다. 인스타에는 실시간으로 취소분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을 달라는 DM이 쏟아졌다. 수많은 DM 더미 속에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업에서 나의 공간을 20대들을 위한 컨셉 스토어로 쓰고 싶다며 매매를 제안하는 DM도 와 있었다. 기업에서 사겠다는 금액은 8억 원. 이 공간을 준비하며 들인 투자금을 생각하면 파는 것이 당연하나 이번에도 역시 명쾌하게 수락을 할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이 함께 하나하나 일군 공간이자 고객들에게 받았던 사랑과 추억이 가득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전문 관리인에게 관리를 맡긴 상태이지만 hide의 비밀스러운 특별공간과 정원 곳곳의 나무와 꽃들 하나에도 특별함이 녹아있는 곳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은 계절별로 우리 가족들의 좋은 별장이 되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 이곳을 팔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번 제안도 거절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몇 년 전부터 이어오고 있는 편지 테라피의 일을 시작했다.편지테라피는 무료서비스로 누구나 마음이 힘든 사람은 신청하고 무료로 매주 메일로 나의 편지를 받아볼 수 있다. 불특정 다수에게 보내는 응원과 격려의 글이지만 온기가 담긴 진심 어린 글 한편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알고 있어 시작한 나눔이다. 오늘로 구독자는 10만 명. 그들에게 오늘도 최선을 다해 따듯한 위로를 보내고 싶다. 오늘 편지는 한 해가 다 끝나가는 데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것 같아 마음이 텅 빈 사람들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적었다. 메일을 발송하자마자 특별한 답장을 한 통 받았다. 보낸 이는 얼마 전 매사에 최선을 다하지만 나에게는 최선을 다하지 않아 무기력에 빠졌던 사람들에게 보냈던 위로의 편지를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자산가라고 이야기하며 나의 글이 번 아웃에 빠졌던 자신을 구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담아 사례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고민 없이 거절의 의사를 보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마음이 힘든 이들을 위해 기부해 달라고 메일을 보냈다. 


30분 후 기부내역이 도착했다. "편지테라피"이름으로 기부된 금액은 1억 원. 나의 거절이 누군가의 희망이 되었다. 마음이 참으로 기쁨으로 가득찼다. 나머지 자잘한 업무를 가볍게 끝내고, 따뜻하면서도 촉감이 부드러운 가디건을 꺼내 입었다. 그리고 첫눈에 반한 하늘을 보러 밖으로 나갔다.         


나는 오늘 하루 10억 원을 거절했다. 후회와 주저함 없는 거절은 지난 시간 수많은 경험이 만든 내 스토리의 힘! 그리고 그 힘이 선물해 준 경제적 자유 덕분이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의 발걸음 가벼운 산책 



나는 이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자유가 생겼다. 소중한 곳을 지킬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이익보다 나눔을 먼저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내 인생을 내 소신대로 결정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존경받는 엄마이자 아내, 그리고 누구보다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나. 


참 좋은 날이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매거진의 이전글 [쓰는 인생] 브런치 먹지 말고 쓰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