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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이 Nov 13. 2019

불편한 존재,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늘 불편했다. ‘싫은 거냐?’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대답을 망설이다가 ‘그렇기도 하다’라고 답을 할 것 같다. 나의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라 할 수 없었고, 식구들을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가장도 아니었으며, 술이나 도박 등에 빠지는 분도 아니었고, 자식들을 과도한 폭력으로 대하는 분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불편하고 어려웠다.
아버지는 ‘없는 살림’으로 당신까지 일곱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참 열심히 사신 분이다. 집 안에 기계 두 대를 들여, 실 원자재를 가정에서 바로 사용 가능한 형태로 가공하여 의정부로, 동두천으로 직접 그것들을 팔러 다니셨다. 아버지에게는 기계 두 대와 오토바이 한 대가 일곱 식구를 책임지는 생계 수단이었던 셈이다. 나는 기억을 못 하지만 오토바이를 장만하기 전에는 손수레가 오토바이 역할을 대신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어렸을 때 거리 감각이 없던 나는 의정부와 동두천이 얼마나 먼 거리인지 알지 못했다. 서울 동북부에서 의정부까지는 그나마 가까운 곳이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포천으로 차를 몰고 여행을 다니면서 알게 되었다. 당시 우리 집에서 동두천이 얼마나 먼 거리인지를. 또한 오토바이에 그 큰 짐들을 싣고 다니기에는 얼마나 멀고 험하고 위험한 길인지를. 아버지는 가끔씩 다혈질적인 모습을 보이실 때가 있었다. 식구들이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던 중에 어머니와 말다툼을 하시다가 어머니가 조금 큰 소리로 대꾸를 하시자 아버지는 그보다 열 배는 더 큰 소리를 내시며 당신의 밥그릇을 방바닥에 내던졌다. 방바닥은 깨진 밥그릇과 여기저기 흩어진 밥알들로 낭자해졌고, 어머니는 찍소리 못한 채 묵묵히 그것들을 치우셨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로 기억하는데, 나는 그때 어머니가 너무나 불쌍했고, 아버지가 너무 무섭고 싫었다. 그리고 그 순간 뭔가 화가 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아무 표현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던 나는 깊은 무력감을 느꼈던 것 같다. 두 살씩 터울 지는 5남매는 툭하면 치고받고 싸웠다. 막내였던 나는 두 살 위 형과, 네 살 위 누나 정도까지와 싸웠던 것 같다. 아버지는 화가 가장 크게 나시는 순간이면 당신 바지의 허리띠를 풀어 그것으로 자식들을 때리셨다. 한 구석에 몰린 채로, 어디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허리띠를 맞고 있노라면 아프기도 아팠고 무엇보다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바람같이 날아오는 그 허리띠가 내 몸의 어느 부위를 강타할지 모르는 그 공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수치스럽기도 했다. 마치 내 자신이 채찍을 맞고 있는 동물이나 노예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떠올리면 이렇게 싫고 힘들었던 기억들이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이런 기억들만 있는 건 아니다. 아버지의 흰머리를 뽑아드리며 하나에 10원씩인가 받았던 기억, 아버지가 장기를 가르쳐주시고 함께 장기를 두기도 했던 기억, 아버지가 ‘비행기’ 놀이를 해주었던 기억. 그런데도 나는 왜 싫고 힘들었던 기억들이 먼저 떠오르고 그것들을 기억의 전부인 것처럼 느끼는 걸까? 아들 하나를 키우며 나 역시 서서히 아버지가 되어 가는 중이다. 나는 어떤 아버지일까,를 생각하기 이전에 그 옛날 나의 아버지가 식구들을 먹여 살리느라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을지가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진다. 나는 아들 하나 키우는 것도 버겁고 힘든 순간들이 있는데, 자식 다섯을, 그것도 ‘없는 살림’에 키우는 것이 얼마나 버겁고 힘들고 애가 많이 쓰였을까 싶은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늘 돈 걱정하며 ‘돈, 돈, 돈’ 하시는 게 너무 싫었는데, 그래서 나는 ‘돈을 악착같이 모아야지.’ 하는 쪽보다 오히려 ‘돈은 내가 쓸 만큼만 있으면 된다.’하는 쪽으로 가치관이 형성되었다. 그런데 내가 만일 나의 아버지처럼 늘 돈에 쪼들리며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처지였다면 어땠을까. 그때에도 나는 과연 ‘돈은 내가 쓸 만큼만 있으면 되지.’ 하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당장 ‘내가 쓸 만큼의 돈’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가치관을 갖는 것이 가능했을까? 아버지는 58세까지 오토바이를 몰며 가내수공업 일을 하시다가 분당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는 아파트 경비 일을 시작하셨다. 그리고는 그 일을 20년 가까이 하시다가 77세인가의 연세에 그만두셨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그만두신 게 아니라 계약 해지이다.) 이런 아버지의 일생을 떠올리면 나는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마음이 짠해지기도 하고 때론 숙연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나의 아버지가 어렵고 힘들다. ‘아버지’가 찍힌 전화가 오면 선뜻 전화기에 손이 가지 않는다. 또, 아버지의 이야기를 끝까지 잘 들어드려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 대화를 시작하더라도 나의 인내심은 곧 바닥이 드러난다. 언젠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나는 과연 눈물이 흐를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나의 대답은 ‘잘 모르겠다’이다. 이 글을 쓰고 나면 아버지에 대한 나의 감정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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