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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로 Nov 20. 2020

아르헨티나 도서관

언젠가 몇 달간 남미 대륙을 여행하다가 겪었던 기묘한 일을 간혹 떠올리곤 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보르헤스가 관장을 지냈던 마리아노 모레노 국립도서관을 둘러보던 때의 일이다. 그 도서관은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두 문인인 폴 그루삭과 보르헤스가 오랜 기간 자리를 꿰차고 있던 곳으로 공교롭게도 둘 다 도서관에서 시력을 잃었다.


나는 보르헤스의 책을 손에 쥔 채 도서관 주변에서 벤치를 찾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보르헤스의 도서관에 왔으면 보르헤스의 책 정도는 읽어줘야지 하는 허세가 발동한 셈이었다. 그 책에는 그루삭이 언급되는 부분도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그곳 앞에서 보르헤스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명소와 관련된 유명 인사의 뒤나 좇는, 따분하고 진부하고 촌스러운 관광객 부류로 비치지나 않을까 내심 우려하는 바가 없지 않았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키 작고 평범한 동양인 한 명이 벤치에 앉아 책을 읽든 말든 뭘 하든 누가 신경이나 쓸까. 하지만 거의 모든 벤치를 방문객들이 점유하고 있는 관계로 어쩔 수 없이 계속 그 주변을 맴돌아야 했다. 문득 한 사람이 앉아 있는 벤치가 눈에 띄었고 그리로 다가가 한쪽 끄트머리에 슬쩍 앉았다. 다리가 아파 더 이상 돌아다니긴 힘들 것 같았다. 옆 자리를 힐끔 살펴보니 그는 벤치에 기대어 비니를 끌어내린 채 졸고 있는 듯했다. 검은 고양이 한 녀석이 알짱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책을 펼쳐 「쿠블라 칸」이라는 시로 잘 알려진 영국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에 관한 장을 읽기 시작했다. 「쿠블라 칸」은 콜리지가 몽골제국의 제5대 칸인 쿠빌라이 칸의 궁전을 꿈에서 보고 영감을 얻어 쓴 미완의 시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쿠빌라이 칸의 후손 라쉬드 에딘에 의하면 그 궁전은 쿠빌라이 칸이 꿈에서 본 것을 토대로 세운 것이다. 그러니까 13세기 어느 몽골 황제가 궁전에 관한 꿈을 꾸어 궁전을 지었고, 18세기에 와서 한 영국 시인이 그 궁전에 관한 꿈을 꾸어 시를 지었다는 얘기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길 해당 대목이 무척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은 그 무렵 꿈을 둘러싼 우연성, 꿈의 전이에 대해 주목하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일전에 보르헤스가 대여섯 살 난 조카에게 매일 아침 꿈 이야기를 듣던 때의 일화를 들려주는 대목을 또 다른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보르헤스가 조카에게 무슨 꿈을 꾸었느냐고 물었을 때 조카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젯밤 숲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꿈을 꿨어요. 한참 헤매다가 겨우 통나무집을 찾았어요. 구불구불한 계단이 나 있고 층계에는 카펫이 깔려 있는 집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삼촌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의아하다는 듯 한 마디 덧붙인다.


“대체 거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예요?”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 새삼 그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넘어오기 전 바릴로체에 머무는 동안 스위스인 여행자 앨리나와 알고 지냈는데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가 묵던 게스트하우스에서 늦잠을 자던 앨리나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 일어나더니 내게 따져 물었다.


“헤이, 너 도대체 뭐야? 내가 그렇게 도와달라는데 보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기만 하고.”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내게 그녀가 잠꼬대하듯 어눌하게 말했다.


“자고 있는데 이 집 고양이가 내 배에 올라타더라고, 덩치도 작은 놈이 무겁기는 엄청 무거워서 밀어내려고 하는데 꿈쩍도 안 하는 거야. 게다가 점점 무거워지고 털도 빳빳해지는 게 꼭 박제동물 만지는 느낌이어서 소름끼치더라고. 내 힘으론 안 될 거 같아서 널 불렀는데 날 힐끗 쳐다볼 뿐 미동도 안 하잖아. 어쩜 그럴 수 있어?”


그 생각을 하며 책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데 마침 앨리나에게 연락이 왔다. 내가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넘어오면서 서로 갈라졌지만 여전히 페이스북 메신저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냐고 묻는 앨리나에게 장소를 알려줬더니 그녀는 자기도 근처에 있다며 만나자고 했다. 앨리나가 여기 있다고? 믿기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반가운 마음이 앞서 마중을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우리는 희한하게도 자꾸 길이 어긋났고 그녀가 이리로 오라며 장소를 언급할 때마다 나는 계속 이리저리 발길을 돌려야 했다. 급한 마음에 발걸음을 재촉해 보지만 그럴수록 도서관 건물에서 멀어질 뿐이었고 급기야 앨리나가 짜증을 내기에 이르렀다. 울창한 나무와 벤치가 죽 이어져 있는 구불구불한 길에서 나는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고만고만해 보이는 길을 걸으며 대체 앨리나는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이해해보려 애를 썼지만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다리가 아파 벤치에 앉았을 때 옆자리에 앉아 있는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비니를 뒤집어 쓴 사람이었다. 결국 다시 제자리로 온 모양이었다. 그는 고양이를 안은 채 내게 뭐라 말을 건네고 있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가 소리를 지르고 있는 걸까? 갑자기 내 주변을 둘러싼 시공간이 멋대로 휘어지면서 시간이 꾸물꾸물 흘러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 순간 퍼뜩 눈이 떠진다. 그리고 앨리나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온다.


“헤이, 너 도대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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