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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로 Nov 21. 2020

탈주

도시에 땅거미가 질 무렵 우중충한 잿빛 건물 사무실 안에 조직원 몇 명이 모여 있다. 조직이라고 해봤자 보통 구린 일을 도맡아 뒤처리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뚜렷한 목표의식 없이 주어진 일을 수행할 따름이다. 내가 뭘 추구하고자 하는지 그런 건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그저 책임감을 중시하는 사람답게 묵묵히 일에 매달리는 부류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에 만족한다는 건 아니다. 그런 하찮은 일이 성에 찰 리 없으니 말이다. 조직 안에서 늘 이방인처럼 붕 떠 있는 이유가 거기 있다. 


나는 블라인드 틈새로 창밖을 힐끔 내다본다. 분위기가 험상궂다. 조직원들 사이에 험한 말이 오간다. 누가 조직을 배신했느니, 위장 잠입한 스파이가 이 안에 있느니 하는 말들로 시작한 실랑이는 배신한 조직원을 색출하려는 쪽과 이를 부인하는 쪽 사이의 대립으로 치닫는다. 추궁과 협박의 말들이 수위를 높여가던 중 별안간 총성이 울린다. 누군가 총을 빼들고 의심이 가는 일원에게 총격을 가한 것이다. 일대 혼란이 야기되고 이내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된다. 총을 쥔 놈들은 나처럼 빈손인 놈들을 제거하려 달려든다. 죽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들과 뒤엉키다가 간신히 비상구로 빠져나간다. 


건물 외벽에 나 있는 계단을 통해 뛰어 내려간 후 미친 듯이 거리를 내달린다. 그러다 어느 건물 안 옥상 위에 다다른다. 또 다른 건물 옥상으로 넘어가려 하는데 거리가 상당하다. 지레 겁먹고 망설여서는 안 된다고, 망설일 틈 없이 단숨에 뛰어 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숨을 고르고 몇 발자국 뒤에서 뛰기 시작해 옥상 가장자리에서 힘껏 도약한다. 주변의 건물을 비롯한 모든 풍경이 허공에서 빠르게 흩어지는 것을 느낀다. 이 순간을 모면하기만 한다면 내가 왜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는지 정도는 곱씹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나는 아래로 곤두박질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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