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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로 Nov 22. 2020

택시기사

제주 공항을 나서자 택시 기사가 우리를 미소로 맞아 주었다. 다음날 우리 일행과 만나기로 되어 있는 지인의 부탁으로 우리를 태워주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는 비행기가 도착할 즈음에 맞춰 공항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의 미소는 제주 여정의 출발선에 놓인 우리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 주었다.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내는 제주의 풍광이 쾌청한 날씨 덕에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서귀포 숙소로 향하는 길에 그는 제주의 날씨와 풍경, 도로 사정과 사고 현황, 제주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반목 등을 주제로 솜씨 좋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벌써 빨갛게 물들어 가는 나무들이 보이지요? 잠시 후에 고도가 높은 곳으로 가면 이보다 더 진하게 물든 나무들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제주에선 난폭하게 운전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사고가 많이 나지요. 전 운전하기를 좋아하지만 천천히 차를 몰곤 한답니다.”


살갑고 겸손하며 품위가 묻어 나오는 언행이 인상적이었다. 쓰는 단어나 말투도 어딘가 서정적인 구석이 있었다. 일행이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아무때나 끼어들어 훼방을 놓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타이밍에 부연 설명과 자신의 의견을 유연하게 얹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곧 숲터널이 나옵니다. 울창한 나무들이 터널을 형성하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지요. 저기가 성판악 휴게소입니다.”


그는 여행 가이드로서 자질도 충분해 보였다. 한데 아무리 봐도 그는 택시 운전을 오래 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택시 기사라 하기엔 지나치게 서행 운전을 하는 모습이었고 안정적으로 차를 몰았던 것이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택시 운전은 제주에 내려와 시작하신 거지요? 그전에는 혹시 다른 일을 하시지 않았나요?”


역시 내 짐작이 맞았다. 그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퇴직하고 제주에 내려와 목표한 것들을 하나씩 실천하는 중이라고 했다.


“택시기사도 그중 하나였지요. 그렇지만 이달 말까지만 하고 그만두려고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힘들어서 그렇다고 했다. 차 안에 오래 앉아 있으니 몸에 무리가 갈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성격이 드센 원주민들을 상대하기가 조금 힘에 부친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하대하는 경향이 있는 손님을 만나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피상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준비 중인 사업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무슨 사업을 구상하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더 이상 캐묻진 않았다. 택시에서 내린 뒤에야 물어볼 걸 그랬나, 하고 조금 후회했다.


나중에 지인에게 듣기로 그는 증권사에서 전무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그 말을 듣고서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전에 익숙한 고위 관료나 기업 임원 출신일수록 특유의 권위적인 모습이 말투나 행동에서 은연중 드러나기 마련인데 그에게선 그런 면모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회가 된다면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데 그럴 기회가 있을진 모르겠다.


다음날, 우리는 장소 이동을 위해 또 한 번 택시를 타야 했다. 오후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전 일찌감치 체크아웃을 하고 인근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이었는데 깜빡 잊고 온 물건이 있어 다시 숙소에 들렀다가 목적지인 서귀포 칼호텔로 향할 생각이었다. 앱을 이용해 근처를 지나는 택시를 잡아 탔다.


경유지와 목적지를 말하자 택시 기사는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는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모시겠습니다, 하고 다소 과장된 톤으로 말했다. 정중한 듯 말하지만 어딘가 인위적이고 어색한 구석이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제주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십니까?”


모두가 말없이 앉아 있는 가운데 불쑥 그가 물었다. 택시 기사는 그 나름의 호의와 친근함으로 말을 건넨 것이겠지만 어쩐지 작위적이고 연극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막 영화를 보고 나온 직후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피로해서인지 아무도 선뜻 입을 떼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무도 대답이 없자 네, 하고 내가 짧게 대꾸했다.


“목소리가 작네요. 별론가 보다.”


그가 즉각 반응하며 웃었는데 왠지 놀리는 듯한 투로 들려서 기분이 묘했다. 사실 분위기가 그렇게   그보다 앞서 벌어진 상황의 영향이 컸다. 길가에 스타렉스를 세워 놓고 통화 중인 여성 운전자가 눈에 띄었는데 차체가 상당 부분 찌그러져 있는 걸 보고 그가 혀를 끌끌 찼다.


“여자들이 저러니까 사고가 나는 거예요. 왜 괜히 저기서 통화를 하느냔 말이에요. 꼭 저렇게 사고를 자초한다니까.”


그는 연신 투덜댔다. 거기서 그치면 좋을 텐데 그는 1절, 2절이 아니라 4절, 5절까지 멈추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 중에 누군가가 그의 말에 호응하길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택시 안에는 운전사와 나를 제외하고 세 명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택시 안은 급속도로 얼어붙은 듯했고 일행의 입은 굳게 닫혔다. 택시 기사는 그에 아랑곳없이 홀로 대화를 이어가려는 시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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