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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로 Dec 31. 2020

세계 정상을 향한 여왕의 여정

넷플릭스 오리지널  <퀸스 갬빗(The Queen's Gambit)>

이 시리즈를 보면서 어린 시절 문방구에서 체스판을 샀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저렴한 가격의 체스 세트였지만 그 안에 들어있던 기물들의 자태는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체스 기물의 디테일은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을 손에 쥐고 있으면 마치 내가 뭐라도 된 듯한 기분, 고급스러운 문화를 향유하는 듯한 허세에 취하곤 했던 것이다. 경기 방법과 기물의 행마법 정도가 적혀 있던 설명서에 의존해 체스를 익히던 순간의 기억이 아련하게 남아 있다. 


그렇지만 베스 하먼처럼 체스에 깊이 빠져들진 못해서 친구들과 몇 차례 체스를 두는 데 그치고 말았다. 만약 내게 샤이벌 씨처럼 진지하게 체스를 알려준 스승이 있었다면, 64개의 흑백 칸 안에 무한한 가능성이 숨어 있고 그 안에서 무궁무진한 전술과 전략이 펼쳐질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 귀띔이라도 해주었다면, 그리 쉽게 체스와 멀어질 수 있었을까?


<퀸스 갬빗>은 어린 시절부터 내가 체스에 대해 갖고 있던 이미지만큼이나 우아함을 갖추고 있다. 자극적이거나 튀는 요소가 없다. 체스는 무척이나 정적인 게임이다. 플레이 상황만 놓고 보면 그렇다. 체스판을 둘러싸고 역동적으로 돌아가는 건 오직 플레이어의 머릿속이며 체스 대국을 관전하는 사람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건 고심 끝에 나온 플레이어의 한 수일 뿐이다. 요란하게 그려질 요소가 거의 없다. 그 장면을 고스란히 영상에 담는다고 생각해보라. 뻔하고 지루한 장면들의 연속이지 않겠는가. 이걸 영상으로 구현한다는 건 상당히 도전적인 시도였을 테고 따라서 극적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장치들을 떠올려 봤을지 짐작이 간다. 


감독은 자극적인 양념을 치기보단 매우 절제된 연출로 인물의 감정과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체스 게임 장면에선 시계 초침 소리, 플레이어의 미묘한 눈빛 변화, 기물을 쥔 손의 움직임 등 디테일한 묘사가 돋보인다. 시합뿐 아니라 극 전반에서 차분하고 건조한 톤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그러한 연출 스타일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인데 특히 베스 하먼 역을 맡은 안야 테일러 조이의 눈빛 연기가 빛난다. 어린 시절 엄마를 잃은 트라우마와 함께 자기만의 세계, 체스판 안에 갇혀 사는 베스 하먼의 고립감, 체스 경기 도중 보이는 상대의 수에 대한 반응, 승리의 확신, 낭패, 불안, 절망 같은 온갖 감정이 그의 눈빛 속에 다 있다. 


<퀸스 갬빗>이라는 제목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퀸스 갬빗’은 체스 게임 초반부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수많은 오프닝 전략 중 하나로 백이 퀸 사이드의 폰을 희생해 유리한 포지션을 점하고자 하는 전략이다. 베스 하먼은 초반부터 상대를 압박해 들어가는 공격적인 성향을 지녔는데 세계 챔피언이자 끝판왕 격인 보르고프에겐 이러한 방식이 잘 통하지 않는다. 마지막 일전에서 퀸스 갬빗을 오프닝 전략으로 택한 것은 숱한 역경을 딛고 세계 최정상의 위치에 서려 하는 여성 주인공 베스 하먼의 인생 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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