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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레저 여행가 Jan 21. 2024

중년의 도전 : 피아노 한곡 연주!

 바흐 <프렐류드 No.1 C 메이저, BWV 846>

강OO(1975~2075 예정).

낼모레 쉰. 

피아노 배운 적 없음.


스스로의 작전대로 백 살까지 살 수 있다면, 이제 인생의 절반정도를 살아낸 샘입니다. 돌아보면 엄청나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나름 후회 없이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제가 앞으로 브런치에 올릴 미숙한 글들이 알고리즘의 간택을 받아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한 덕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면 또 모르겠습니.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저도 정말 후회하는 한순간이 있습니다.


제가 열 살 무렵이던 화창한 어느 날. 대한민국은 86 아시안 게임 개최를 앞두고 열기가 점점 고조되어 가던 때쯤이었습니다. 엄마가 저와 동생을 부르시더니 동네에 피아노 학원이 새로 생겼는데 가서 피아노를 배워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엄마 동네 친한 언니의 며느리가 피아노 학원을 새로 개업하셨다면서요. 그때 제가 기억하는 한, 십 년 평생 처음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절대로 피아노 학원 따위에는 절대로 못 가겠다며 울며불며 때를 썼습니다. 그런 곳은 고추가 없는 여/자/애/들/이나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여자애들 사이에 앉아서 피아노 따위를 똥땅거린다니, 사나이 체면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엄마가 며칠간 장난감도 사주고, 맛있는 간식도 사주며 동생과 함께 피아노를 배워보라고 저를 달랬지만, 사나이의 자존심을 걸로 절대로 한 발 짝도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저의 승!

           



하지만 인생이란 건 항상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사춘기를 지나고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어가면서 저는 피아노 연주가 점점 좋아져 갔습니다. 여러 음악들을 듣다 보니 나도 근사하게 피아노를 연주할 줄 안다면 너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 지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 옛날에 엄마가 피아노 학원 다녀보라고 했을 때 배웠으면 좋았을걸.' 하지만 이를 깨달았을 때는 버스는 이미 떠난 것도 모자라 진즉에 폐차했을 법한 시간이 흘러버린 뒤였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죠.


밖에서도 연락을 받을 수 있다는 그야말로 혁신적인 통신 기기였던 삐삐. 그 삐삐의 시대가 저물고 PCS폰의 시대로 넘어가던 세기말의 어느 토요일 저녁. 식구들이 저녁 식사 마치고 거실에 둘러앉아 드라마를 보고 있었습니다. 남주(남자 주인공)가 피아노를 치는데 여주(여자 주인공)가 듣더니 감동받아서 눈물을 흘리는 진정으로 고리타분한 장면이 브라운관에 보여지고 있을 때, 제가 속에 있던 한마디를 내뱉었습니다.


"내가 피아노를 배웠더라면 모르긴 몰라도 저 못생긴 남주 보다 열 배는 잘 쳤을 텐데..."

"얘가 느닷없이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그때 엄마가 큰맘 먹고 배우라고 했을 때 배웠더라면 좋았잖아!!"

"아니~ 그때는 상황이..."

"아니는 뭐가 아니야!! 그렇게 징징 울고불고 동네 떠나가라 난리난리를 치더니. 너 때문에 괜히 니 동생도 못 배웠잖아~!!"

"아? 뭐야? 형 때문에 나까지 피아노 못 배운 거야?"

괜히 긁어 부스럼. 본전도 못 찼았습니다.


 에밀 길레스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Piano Sonata No. 14 in c♯ minor, Op. 27-2, 'Moonlight')를 들으며, 나도 이 환상적인 곡을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술 한잔 거하게 마시고 집에 와서 침대에 누운 어느 날 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마리아 조앙 피레스가 연주하는 쇼팽의 녹턴(Nocturnes Op.9)을 들으며  '지금도 늦지 않았어~ 내일 당장 피아노 학원에 등록하자!!'라고 결심도 해보았지만, 아침에 술이 깨고 현실을 마주하면 찐'I'성격인 저는 도저히 꼬맹이들 사이에서 바이엘을 배울 용기 따위 없었습니다.




어느덧 인생의 짝꿍을 만나서 결혼도 하고, 아들도 딸도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아들네미 딸네미 모두 동네 학원에 보내 피아노를 가르쳤습니다. 꽤 오랫동안 학원에 보냈는데요. 안타깝게도 녀석들의 재능과 노력은 평범하여, 반 클라이번 콩쿠루에서 우승한 천재 피아니스트 임윤찬 - 아들과 동갑내기 - 과는 거리가 습니다. 그나마 학교 시험기간에 공부하기 싫어지면 갑자기 피아노 앞에 앉아서 지들 좋아하는 곡 한 두곡쯤 연주할 정도의 실력은 됩니다. 이 녀석들의 피아노 실력은 항상 시험기간에만 발휘되는 게 문제라면 문제죠.    


인생은 반전의 연속. 드디어 저에게도 기회가 옵니다. 저희 집에는 원래 와잎이 결혼할 때 처갓집에서 가지고 온 어쿠스틱 피아노가 있었습니다. 아내가 어려서 피아노 배울 때 사용했던 피아노였는데, 시집오면서 가지고 왔었습니다. 딸네미 시집가고 나면 더 이상 집에 연주할 사람도 없으니, 시집가면서 가져가라는 게 장모님 생각이었습니다. 이 피아노를 저희 집으로 옮겨와서 몇 년은 잘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어쿠스틱 피아노는 이사를 한번 가려고 하면 너무 무거워 옮기기도 어렵고, 때가 되면 조율도 해야 하고, 아파트에서는 아무 때나 칠 수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큰 결심을 하게 됩니다. 정든 어쿠스틱 피아노를 팔고, 디지털 피아노를 구매하는 것으로요.     


어언 삼십여 년 간 못 이룬 꿈을 이루고자 하는 저의 도전은 시작되었습니다. 디지털 피아노의 장점은 소음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거겠죠. 너무 늦거나 이른 시간에 연주하면 타건이나 페달 소음이 이웃집에 피해를 줄수도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지만요. 여튼 호기롭게 피아노 인강을 하나 신청했습니다. 아.. 하지만 저의 피아노 연주 실력은 거의 저의 급여 인상속도에 필적할 만큼 느린 속도로  향상될 뿐이었습니다. 기울기가 거의 제로에 수렴하는, 향상된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죠. 저의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 - 모 광고에 따르면 이 시대의 베토벤 - 에도 불구하고, 너무 늦게 시작한 탓일까요? 손가락은 굳어서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악보를 읽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높은 음자리표 쪽에 그려져 있는 콩나물들을 읽어야 하는  오른손은 그나마 상황이 괜찮았지만, 낮은 음자리표 쪽 콩나물들을  읽어야 하는 왼손 쪽은 상황이 가히 절망적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악보를 읽어가며 그에 맞춰 손가락을 움직인다는 건 애시당초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연주 비슷한 것을 해보려면 악보를 통째로 외워야 한다는 얘긴데... 와이프 핸드폰 번호도 간신히 외우고 있는 마당에 쉽지 않았습니다. 이 외에 여러 스마트폰 앱도 도전해 보고는 했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본인의 노력 부족은 애써 외면하고, 지나버린 시간만 탓하고 있을 때쯤 다시 한번의 기회를 만났습니다. 동네 구립 도서관에 갔던 주말 어느 날. 그날따라 여유가 있어서 책들이 잔뜩 꼽혀있는 서가를 이리저리 구경하였습니다. 그러다 문득 피아노 교재들이 줄줄이 꼽혀있는 서가를 둘러보게 되었는데, 연자주색 표지의 얇은 책 한 권이 눈의 번뜩 띄었습니다. 책의 제목을 읽고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내 생애 한 번은, 피아노 연주하기'.   


피아니스트 제임스 로즈가 쓴 이 책의 소개를 읽어보았습니다. '피아노를 전혀 쳐본 적이 없는 사람도 이 책으로 하루 45분, 6주만 연습하면 바흐의 작품들 중 가장 정교하고 아름다운 곡으로 손꼽히는 프렐류드 No.1 C 메이저를 연주할 수 있다.' 저는 한동안 멈춰 서서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바흐의 프렐류드 연주라니. 아 신이시여~ 이것이 정녕 가능하단 말씀이십니까?




바흐(J. S. Bach)의 프렐류드(Prelude) No.1 C 메이저(BWV 846)라는 곡은 제목만 들으면 굉장히 어렵게 느껴지지만 실제로 들어보시면 어디선가 한 번씩은 들어보았던 느낌이 들정도로 유명한 곡입니다. 이 곡은 유튜브에서도 여러 연주자들의 연주를 들어보실 수 있는데, 정말 아름다운 곡 입니다. 꼭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펼치고 디지털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저자는 한마디 한마디마다 음표들에 대한 친절한 설명과 함께  손가락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쉽진 않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연습을 시작하였습니다. 식구들 몰래 말이죠. 왠지 수줍어서요.


정말 피아노 초보자가, 왠지 거창해 보이는 바흐의 프렐류드라는 곡을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는 걸까요? 여기에는 비밀 아닌 비밀이 있는데요. 먼저 이 작품은 35마디, 연주시간 2분 남짓한 상대적으로 짧은 곡이라는 것입니다. 콩나물들을 외워볼 만(?) 하다는 거죠.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양손을 모두 사용하지만 번갈아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전문 용어로는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왼손으로 건반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건반을 누르고 다시 왼손으로 건반을 누르는 식입니다. 예를 들면 왼손 중지, 엄지를 차례로 누르고 오른손 엄지, 중지,  새끼 또 엄지, 중지, 새끼, 그리고 다음  마디. 이런 식인 거죠. 곡의 끝부분만 제외하면 말입니다.


저자는 6주면 된다고 했지만, 저는 도전을 시작한 지 두 달이 좀 넘어서 어떻게 겨우 떠듬떠듬 끝까지 한번 쳐보게 되었습니다. 피아노를 연/주/한/다/라고 하기는 아직 힘든 수준이지만 말이죠. 역시 쉽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나름 발전이 있었습니다. 어찌되었건 곡의 마지막 콩나물에 해당하는 건반들을 누루고 나서, 앞으로 꾸준히 연습하고자 혼자 굳은 다짐도 해 보았습니다. 올여름쯤 연주라고 불릴 수 있게 피아노 건반을 누를 수 있게 되면, 식구들 모두 모아놓고 짜잔~ 한곡 치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의 바흐 프렐류드 연주에 경악을 금치 못할 식구들의 얼굴이 벌써 떠오르네요.




사실 어려서 피아노를 배워본 적 없는 사람이 나이 들어서 피아노를 제대로 배운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참 편리한 세상입니다. 피아노로 한곡 정도 연주해 보고 싶다면, 꼭 피아노 학원에 가지 않더라도 다양한 앱, 인터넷 강의, 책 등 방법은 많이 있으니까요.


그럼 저는 이만 바흐 프렐류드 C 매이저 연습하러 가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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