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빠와따 Mar 05. 2023

소심한 복수

어느 회사에 전설로 내려오는 사건 

“그러게 내가 잘 검토하고 천천히 진행하자고 했잖아”

염 본부장 방에서 큰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 정도의 민원은 발생할 수 있을 거라는 보고를 드리고 결재받았다'라고 설명하는 오 팀장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진다. '결재한 문서를 가져오라'는 본부장 지시에 김 대리가 보관함에서 서류를 꺼낸다. 결재판에 담아 종종걸음으로 본부장실로 들어간다.


지우개를 집어 들고 결재판을 열어젖힌 본부장 얼굴은 똥색으로 변하더니 이내 검은색이 된다.

오 팀장의 눈은 왕방울만큼 커졌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김대리를 바라본다.

결재판을 전달했던 김 대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7월의 쏟아지는 눈부신 태양 아래 남산 타워로 올라가는 케이블카는 느릿느릿 소걸음이다.




영업본부장인 염 상무는 책임을 지지 않는 업무 스타일로 유명하다.

웬만해서는 품의서에 결재를 하지 않는다.


보고서나 품의 내용이 마무리되면 그제야 제대로 사인을 한다.

중간에 문제가 생기면 보고받은 바 없고,

승인한 적 없다고 발뺌이다.

업무에 대해서 비판만 한다.

대안도 방향도 제시하지 못하는 나쁜 리더다.

그러다 보니 최종 결재권자인 본부장의 사인 없이 진행되는 일이 다반사다.


심지어 결재 서류에 연필로 사인했다가 문제가 생기자 지우개로 지워버린 사건은 전설이 되었다.

일이 제대로 마무리되면 정식으로 사인을 하는 못된 행동을 습관처럼 반복하고 있다.

하는 일이라곤 주로 실무자가 의사 결정할 수 있는 간단한 일에 매달린다. 업무 방해꾼이다.


예전부터 김 대리는 염 상무의 이런 태도를 마뜩잖게 생각하고 있었다.

팀장에게 '한 번쯤 들이박으시라'고 볼멘소리도 했지만 사람 좋은 순둥이 팀장은 늘 웃기만 한다.




염 상무는 지난달에 또 연필로 사인을 했다. 일이 마무리되면 지우개로 지우고 자신의 이니셜이 새겨진 몽블랑 만년필로 사인을 할 것이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생겼다.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하는 리스크였다.

민원이 발생할 가능성은 높지만 진행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했다.

이 정도는 예상했던 수준이다.

염 상무는 올해 말이면 2년짜리 임원 계약이 종료된다. 재계약을 위해서 더욱 안간힘이다.


본부장을 설득하던 팀장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본부장실에서 보고서를 가져오라고 한다.

김 대리가 결재판에 넣은 보고서를 내밀기도 전에 염상무는 낚아채듯 가져간다.

결재판을 열었다. 지우개를 들고 있는 본부장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염 상무가 지난달에 연필로 사인한 곳 위에는 스카치테이프가 붙여져 있다.

<출처 : 픽사베이>


작가의 이전글 자소서 대충 써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