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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와따 Mar 12. 2023

식구 네 명 모두 놀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편성준 작가님의 책 제목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싫어하는 질문이 있다. "꿈이 뭐냐?"라고 묻는 것이다. 나는 그런 걸 생각해 본 일이 별로 없다. 그냥 현재에 만족했다. 큰 걱정이 없었고 미래에도 이렇게 살면 좋을 것 같았다. '이렇게' 란 시기별로 다르지만 한마디로 '노는 것'이다. 소위 요즘 아이들이 노는 것처럼 클럽을 가거나 해외여행을 다니는 제대로 된 노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냥 빈둥빈둥 노는 것이다. 영화 보고, 책 읽고, 산책하거나 멍 때리는 것도 좋아한다. 한강을 바라보는 물멍도 좋고 남산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는 것도 좋아한다. 특히 서울의 야경을 보면서 멍 때리는 걸 강추한다.


고등학교 때 수업시간에는 딴소리하는 선생님을 좋아했다. 선호하는 과목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간중간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해 주셨던 선생님의 말씀만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사람에 대한 진짜 평가는 관 뚜껑에 못질할 때 알 수 있는 거다"라고 하셨던 음악 선생님. "내가 이거 말 잘 못하면 몽키하우스로 끌려갈 수도 있는데......" 라며 정부에 대한 비판을 했던 국민윤리 선생님. 난 가끔 이 선생님이 진짜 어디론가 끌려가실 수도 있다는 걱정을 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정의를 해 주셨던 영어 선생님도 기억에 남는다. "지금 저 운동장에 나가서 모두가 지켜보는데서 키스를 할 수 있으면 사랑하는 거다" 그런 잡답에만 솔깃했고 나머지 공부 관련된 수업내용은 귀 담아 듣고 싶은 얘기가 별로 없었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도시락을 까먹으면서 떠드는 것이 즐거웠고, 야자 시간 전에 농구를 하는 시간이 좋았다. 학력고사가 끝나고 술, 담배를 먼저 배운 친구를 따라서 어른 흉내를 냈던 시절도 행복했다. 며칠 동안 친구 집을 옮겨 다니며 밤새워 고스톱을 쳤다. 지겨워지면 당구장으로 자리를 옮겼던 그 시절이 그립다. 좋은 대학에 입학해서 번듯한 직장이나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목표를 세웠던 주변의 친구들과 나는 분명히 달랐다. 공부에 재주가 없었으니 그렇게 생각을 했던 것인지 그런 생각으로 공부를 멀리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대학에 입학을 해서도 그냥 하루하루 빈둥거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다. 수업 시간에 자리에 앉아 있었던 기억이 별로 없다. 저녁이면 주점에서 선배들이 사 주는 막걸리를 마셨다. 쓰잘데기 없는 '정의'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내 청춘은 지나갔다. 친구들과 여행을 하는 즐거움이 제일 컸다. 당시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못하는 시절이었다. 전국일주를 하겠다고 야심 차게 출발했던 그 여름 방학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군대를 다녀와서 조금 변하기는 했다. 취직해서 돈은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도 내 가치관에 큰 변화는 없었다. "아무 데나 들어가서 대충 살면 된다"라는 생각이었다. '그냥 월급쟁이나 하지 뭐' 당시 내가 입에 달고 다녔던 말이다. 그 말처럼 월급쟁이가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다들 취업을 하는 분위기였으니 나도 그런 시류를 따랐을 뿐이고, 어떤 일을 하고 싶다는 목표는 없었다. 당시에 채용 공고가 나면 전공은 불문이었다. 직무는 관리, 영업, 전산 정도로만 나뉘어 있었다. 남자는 군면제 또는 군필 정도가 조건의 전부였다. 지금처럼 취업이 힘든 시기가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다. 직무를 중심으로 신입사원을 뽑았다면 아마 진작에 취업도 못하고 백수가 되었을 뻔했다. 내 전공은 불문이 아니라 일문이니까......


졸업 전, 얼떨결에 회사원이 되었고 몇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나는 성실한 직원이 되어 있었다.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모범직원이었고 일을 맡기면 끝까지 책임지는, 윗사람들이 신뢰하는 인사팀의 꿈나무로 성장했다. 그렇게 동기들 중에서는 물론이고 선배들 보다도 승진이 빨랐다. 많은 월급쟁이가 꿈꾸는 임원이 되었다. 내가 지녀왔던 가치관 '대충 살면 되지'라는 모습은 지난 27년 동안 잠시 접어두었다. 요즘 어느 유명 강사의 새벽 기상 캠페인이 당연한 일상이었다. 5시면 벌떡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고, 퇴근은 새벽에 집에 와서 옷만 갈아입고 다시 출근하는 일도 많았다. 어느 겨울에는 프로젝트를 하면서 한 달 동안 책상에 엎드려서 쪽잠을 자기도 했다. 2~3일에 한 번씩 옷을 갈아입으러 집에 들르는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작년에 갑작스럽게 퇴직을 했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다. 낙천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관적이지도 않다. 지나간 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의 일만 생각하자면서, 원래 꿈꾸던 한량이 되는 길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책도 읽고 여행도 다녔다. 해 보고 싶었던 인스타그램도 해 봤다. 여전히 공부 쪽은 지속하질 못하고 하다 말다를 반복했다. 영어가 그랬다. 그렇게 작년 한 해를 살았다. 우리 식구 네 명이 모두 놀았다.


백수가 되면 제일 먼저 겪는 어려움이 있다. 경제적인 문제 말고 또 있다. 나를 소개하는 일이다. 누군가를 만나면 늘 '하는 일'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마땅하지 않아서 고민이다. 세상 사람이 모두 직업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무섭다. 놀아보니 예상대로 세상 제일 행복한 일이 바로 노는 것이다. 경제적 문제에 대한 압박만 없다면 여행 다니고, 책 읽고, 영화 보고, 지인들과 운동하고 이런저런 수다를 떠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을까?



<지인이 보내준 그림>


지난가을에 지인이 내 카카오톡에 있는 옛날 프로필 사진을 보고 그것을 그려서 액자로 만들어서 선물을 해 주었다. 그 작가분이 전시회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SNS로 알게 되었다.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었다. 작은 화분이라도 보내려고 주문을 했다. "작가님 전시회 축하드립니다" 또 벽에 부딪혔다. 내가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면 "oo 회사 인사실장 박봉수"라고 리본을 달면 그만이다. 백수인 나는 도대체 쪽에는 뭐라고 적어야 할까? '작가 박봉수'라고 쓸까도 생각했다. 백수가 된 후에 직업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장난스럽게 브런치 작가를 신청했다.  대충 신청을 한 것이 운 좋게도 승인이 되었다. 그래서 당당하게(?) 인스타에 '작가'라고 적어 놓았다. 당시에는 브런치에서 발행한 글은 한 편도 없었다. 그러니 축하 화분을 보내면서 거기다가 '작가'라고 적는 것은 남사스러워서 차마 할 수 없었다. '박봉수' 그렇게 이름 석 자만 적었다. 나를 나타내는 무언가가 없다는 것에 대한 허전함일까?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시간이 가까워졌음에 대한 불안일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후자인 것 같다. 덩그러니 남겨진 내 이름 석 자를 보면서(쓸데없이 큰 글자에 민망했다)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작년 연말쯤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지내온 시간과 지낼 시간들, 그리고 살아온 날들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목표를 세우는 걸 싫어하는 내가 그랬던 것은 그날 제법 많은 눈이 내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목표는 1주일에 1편씩은 브런치에서 글을 발행하는 것이다. 쉽지 않다. 일요일 밤이 되어야 겨우 끄적이니 말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해 보려고 다짐한다. 

<전시회 축하 화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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