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난이 과거형이 된다 해도 우리의 가난은 진행형이기에'
"굳이 가난했다는 말을 자기소개 맨 앞에 하실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좋은 이미지는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기업 필기시험에 붙고, 난생처음으로 취업스터디 그룹에 들어가 우리끼리 모의면접을 했을 때다. 나는 '짧게 자기소개를 하라'는 면접관의 질문에, "저는 가난했었는데..."로 시작하는 나의 이야기를 했었다.
나는 당황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섯 명쯤, 그때까지 꽤 열심히 살아왔다는 것 말고 이래저래 다른 사람들이었는데. 그 사실 하나로, 나는 어떠한 부연설명 없이 그들의 피드백을 납득했다.
그보다 더 당황스러웠던 건 그다음이었다. '그럼 나를 어떻게 설명하라는 거지?' 그때까지 내 삶은 '가난'으로 점철되었고, 모든 불행, 모든 기쁨, 모든 결정, 모든 관계가 '가난'에서 시작되었고, '가난' 위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가난'과 연결되어 있었다. 아니, 모든 기억이, 실제 모든 사건이 그러했다.
나는 말 그대로 어안이 벙벙해져서 바보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하늘색을 빼고 어떻게 하늘을 설명하지? 밀가루를 빼고 어떻게 빵을 설명하지?
하지만 나는 그들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다시는 나를 설명할 때에 '가난'을 입에 올리지 않기로 했다. 면접뿐 아니라 그 외 모든 사회적 관계, 사적인 만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배변활동을 하지만, 굳이 상대에게 "나 방금 똥 싸고 왔어."라고 말하진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굳이 알려줄 필요가, 나와 연결시켜서 좋을 게 없는, 그런 것이라고.
그 다짐이 나를 불편하게 한 적은 없었다. 생각해보니 (상대의 유년시절이 유복했는지 궁핍했는지) 그다지 서로에게 궁금하지 않기도 했고, 20대도 중반이 지난 시점에 그러니까 경제적 자립을 하는 과정에 있는 내가 원가족의 가난을 평생 없앨 수 없는 낙인처럼, 언젠가 까야 할 히든카드처럼 쥐고 있는 것도 우스웠다.
이제 부모의 직업이나 수입에 대해 때마다 적어낼 일도 없었고, 어떤 혜택이라도 받기 위해 구구절절 코끝 찡하게 이야기를 풀고 최소한의 진실이 담긴 서류를 떼고 제출하느라 묘하게 수치스러워질 일도 없었다. 나를 만나는 사람 중에 내 부모의 얼굴을 아는 사람도, 내가 사는 집의 모양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것은 그토록 원했던 자유이기도 했다. 부모와 나를 분리시킬 자유, 그런 (불우한) 환경과 상황에도 불구하고 잘, 아니, 특별하고 비범하게 자랐음을 내보일 필요 없는 자유.
나는 정말 자유로웠고 행복했다. 예상보다 구직기간이 길어지고, 기대했던 것에 훨씬 못 미치는 급여를 받으며 직장생활을 하고, 내가 갚아야 할 학자금융자가 몇천 단위로 존재해도, 나는 어떻게 그렇게 태평했을까? 마치 돈에서, 가장 현실적인 판단과 결정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을 일부러 택하려는 것처럼, 아니면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도망치는 것처럼, 나는 조금의 여유가 생길 때마다 현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가난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건전한' 가치관을 가진 탓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것도 가난에 대한 반응이었나 보다. 나름의 복수 같은. 나를 지키는 방어기제 같은.
적당히 중산층인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은 후로 그의 부양 아래 살면서 가난은 정말 과거의 일처럼 되어버렸다. 하지만 때때로 나만 어떤 강을 건너와 내가 두고 온, 아직 그대로인 친정의 상황을 마주한다. 내가 하는 말, 어떤 습관, 내게만 보이는 그물, 자꾸 부딪히는 벽, 유난히 방만해지거나 난데없이 인색해지는 순간에 여전히 나의 구석구석에 건재하는 가난의 흔적을 본다. 모른 체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나는 왜 그때마다 숨다 들킨 것처럼 멋쩍어질까.
그러니까 나는 가난에 빚을 진 것만 같다. 하나하나 떠올리면 나 혼자 며칠을 울 수도 있는 기억들이 있는데, 거기서 벗어났다고 잊고 싶지가 않다. 지난 삶과 지금의 나를 아무리 긍정해도 그때로 돌아가 다시 겪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벌써 처참한데, 그것이 현재의 현실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지나간 일 같지가 않다.
가난에게 무언가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 <슬픔의 방문>을 읽고 뒷덜미를 잡힌 사람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슬픔의 방문>, 어떤 책은 나에게 온다). 이야기를 쓰기 위해 한사코 남들이 보고 싶어할, 흥미를 끄는 인생을 찾다가 '네가 가진 걸 두고 바보같이 뭐 하고 있냐'는 핀잔을 들은 것 같았다.
가난에 대해, 나의 가난에 대해 쓰겠다고 마음먹고도 오래 생각을 굴리기만 했다. 그러다 이 책, 안온 작가의 <일인칭 가난>을 만났다. 짧고, 무겁고 불편하고 음울하고 날카롭지만, 마치 소설처럼 재미있게 읽히는 이 책을.
내가 늘 '제일'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부와 빈곤이 수직적 관계이듯, 어떤 빈곤과 그보다 더한 빈곤도 그러하다. 아주 사소한 지점에서 빈곤의 순위는 뒤바뀐다. 그 지점은 가난의 원인이 무엇이냐에 따라, 몇 살에 그런 가난을 경험하느냐에 따라, 비/수급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수급 여부, 그러니까 "제도권 안에 들어온 사람들하고 들어오지 못한 사람 사이의 차이가 너무 크"다. 기초생활수급자였던 나는 제도권 안에 있었기에 제도권 밖, 즉 수급 밖의 가난이 어떠한지는 멀리서 보고 들었으되 그 사정에 훤하지 못하다. 그래서 '가난'을 주어로 문장을 쓸 때는 심히 망설였지만, 그래도 썼다. 다른 누군가가 이어서 일인칭의 가난을 쓸 테니까. 세상에는 빈곤 계측 모델로는 잡히지 않는 일인칭의 쟁쟁한 목소리들이 필요하다.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책을 쓰고 팔고 사는데, 가난이라고 못 팔아먹을까. 더 쓰이고 더 팔려야 할 것은 가난이다.
나의 가난이 과거형이 된다 해도 우리의 가난은 진행형이기에, 이 책은 일인칭으로 쓰였으나 일인분짜리는 아니다. 그런 마음으로 썼다. /9-10쪽
이렇게 똑똑하고 마땅한 이유로 '일인칭 가난'이라는 멋진 제목을 달다니. 이렇게 도발적인 말로 책을 쓰는 이유를 대다니.
가난한데도 집에 피아노가 있고, 쉼 없이 연애를 하고, 해외여행을 가고, 대학원에 진학하고, 고양이를 키우느냐고 어떤 사람은 코웃음 치며 딴지를 걸겠지? 나는 그런 사람들을 알 것 같다. 작가가 한 움큼씩 조심스럽게 꺼내놓은 이야기들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가난이 무슨 경쟁이라도 되는 듯 자신의 처지를 내세워 이기려는 사람들. 작가의 모든 삶이 오직 불우와 불행으로 가득차야 그의 가난을 인정해주겠다는 듯이, 작가에게 '보통'의 사람들과 비슷한 욕망과 꿈, 소유와 시도가 보이면 화들짝 놀라고 의아해하는 사람들. 그들은 무엇이든 자기의 좁은 세계 안에 가둔다.
나는 '멸균우유'에 심술이 났다가 꽉 붙든 에피소드나 '소주컵만 한 바퀴벌레'로 생생하게 그려진 가난에서, 코뼈가 부러진 알코올중독자 아빠와 마사지 관리사에게 팁을 과하게 주고는 엉뚱한 변명을 하는 엄마에게서, 남자친구들과 헤어진 저마다의 이유나 같은 처지의 친구와 나눈 그들끼리만 통하는 농담에서, 백석의 시를 기도문으로 외는 작가의 어떤 순간에서, 처절하게 모든 삶에 깃들어 있는 가난을 배경으로 '안온'이라는 한 개인, 그리고 그만의 삶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하늘은 하늘색이라고만 설명하면 안 된다. 빵을 말할 때 밀가루는 기본일 뿐이다.
알 것 같고, 비슷한 장면이 떠오르고, 나의 일인 것만 같은 작가의 모든 이야기가 내게 이상한 춤처럼 다가왔다. 흥겨운 것도 신나는 것도 아닌 것이, 흥미롭고 신선해서 내내 뭉툭하지 않은 동작들을 눈에 담으려고 했다. 같은 내용이라도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읽힐 수 있는지, 작가에게 배우는 시간이었다.
내 돈을 보태서라도 '더 팔려야 할' 책이라고 생각했고, 그 어떤 책보다 '쓰라'는 충동으로 나를 일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