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이야기를 찾고 있었던 걸까?
0.
2023년 나의 '올해의 책'이다.
1.
한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이 책을 선물로 주었다. '좋다'고 말해준 사람도 있었는데, 나만큼 좋았던 것 같진 않고, '잘 읽었지만, 좀 힘들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슬픔과 고통 등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감정을 대면하게 되어서,라고 했다. 나머지는 피드백이 없었다.
책이나 사람이나 '만남'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때, 나에게 온 이 책은 '슬픔의 방문'이기도 했고, '가뿐한 초대'이기도 했다.
2.
읽는 내내, '잘 쓴 글이란 이런 거였지' 했다. 하나의 장마다 개인사를 두어 권 책 소개와 함께 엮었는데, 군더더기가 없으면서 스타일이 있었다. 이야기에 빠져 읽다, 문득문득 감탄했다.
소개된 책들도 어찌나 내용과 찰떡인지, 책 소개를 하려고 개인사를 꺼낸 건지, 아니면 워낙 읽은 책들이 많아 개인사에 적합한 책을 쏙 꺼내온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읽겠다고 목록에 올린 책이 많았다.
3.
그중 <아무튼, 술>, <냥글냥글 책방>,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었다.
<아무튼, 술>은, 술알못이자 술찌인 내가 거의 간증기를 쓸 뻔할 정도로, 술에 대한 마음을 바꾸도록 한 책이었다. 김혼비 작가의 매력에 빠지게 한 책이기도 하고.
<냥글냥글 책방>은 고양이에 대해 이제 막 처음으로 궁금해져서 대충 훑어나 볼까, 하고 열었다가 단숨에 읽었다. 이후로 <거실의 사자>, <고양이의 기묘한 역사>까지 손에 들게 됐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인생 책' 목록에 올렸다. 선물하기 어려운 책이지만('이거 시어머니한테 드림 안 되겠지?' 물으면 사람들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모두가 읽었으면 좋겠다.
어쨌거나, 이렇게 다른 책으로, 다른 주제, 다른 영역, 다른 생각으로 뻗어가게 해주는 책이라 귀하다.
4.
하지만 그보다 이 책이 내게 특별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2년간 했던 '드라마 작가' 공부를 마무리 지을까 말까 하고 있었다. 소설을 좀 더 잘 써보겠다고 시작해놓고는,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어서 (소설가보다 더 해볼 만한 직업이겠다는 욕심이 생기기도 했고) 마음이 달려가고 있었다.
일단 2년은 최선을 다해 해보겠다,가 목표였는데, 어느 순간 '드라마 작가 지망생'처럼 굴었다. 열심에 대한 보상, 재능의 흔적, 그리고 성공의 기미를 그악스럽게 찾았지만, 내가 얻은 것은 조촐한 낭패였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뭐가 문제인지도 몰랐다.
나는 사실 드라마를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데... '지망생'이 되는 게 싫어서 그 길은 잘도 치우면서 살아왔는데... 하면서 이쪽으로 기우뚱, 하지만 이렇게 마음이, 목표가, 삶이 바뀔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2년 가지고 어떤 결과를 내려고 하지 말아라. 최소 10년은 해야지. 아니, 5년이라도 성과에 몸 달아 하지 말고 묵묵히 해봐'라는 애정 담긴 조언에 저쪽으로 기우뚱.
그러다 이 책을 읽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내 삶이, 내 경험이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니, 이 정도로 내 얘기 같았던 책이 있었던가..?
책을 읽다가, 그것도 에세이를 읽다가 이렇게 많이 울다니. 전체 3부 중 특히 1부에서 그랬는데, 소리 없이 울다가 목이 메어서 책을 덮고 진정할 시간을 가져야 할 정도였다.
그러니까 저자의 '슬픔'에, '아픈 유년시절'과 '버젓한 현실'에 단순히 공감되었던 게 아니라, 나의 지난 삶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난, 가족, 친구, 학교, 폭력, 어떤 노력들. '자신만 겨우 운 좋게 그곳에서 건너왔다'고 할 때, 오랫동안 못 본 체했던 안도를 기억하고 당황했다.
내 경험이 특별한가? 희귀한가? 아니. 세상엔 가난한 사람이 더 많고, 아픈 일들이 더 많을 텐데?
그런데 나는 이렇게 딱 내 얘기 같은 책, 그래서 이렇게 나를 울게 하고, 아프게 하고, 기억하게 하고,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를 왜 이제야 접하지?
내가 못 찾은 걸 수도, 내 손에 안 들어온 걸 수도 있지만,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봤자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찾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이런 게 아니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아니, 당장... 내가 그러고 있었다. '드라마는 상품'이란 얘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남의 돈 들여 만든 상품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해서 분명한 성과를 내야 하는 상품이라고, 예술 하려면 다른 거 하라고, 그러니 상업적으로 팔리는 이야기를 쓰라고.
당연한 말이었다. 어떤 이야기가 '상업적으로 팔리는 이야기'가 될지는 방송사 드라마 국장도, 한때 대박을 터뜨린 작가도 모르지만, 되던 것도 안 되고, 말도 안 되는 시도가 먹히기도 하고 그렇지만, 어쨌거나 일단 참신한 소재로 보편적인 욕망을 담아야 했다.
나는 나의 이야기가 아닌, 내 삶이 아닌,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한, 대리만족할 만한 직업과 상황과 인물들을 찾아 헤매었다. 거기에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주제로 잘 버무릴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5.
저자 장일호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나는 눈이 번쩍 뜨이고, 눈물 콧물 흘리다가, 가슴이 빠개지는 것 같았다. 내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서 듣는 것만으로도 이럴 수 있는데... 나는 어떤 이야기를 찾고 있었던 걸까? 누구의 이야기를?
나는 내 이야기를, 누군가의 진짜 이야기를 쓰겠어.
또 쓸데없이 비장해지고 말았지만, 고민의 종지부를 찍는 것은 유쾌한 일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찾고 즐기는 이야기는 그럴 만한 이유가, 가치가 있다. 나도 절절히 느낀다.
하지만 그건 내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건, 아주 적은 사람이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이야기'로 만날 수 있는 세상이라는 걸 받아들였다.
나에 대해 아는 건, 조금은 슬프고 대체로 가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