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도 헤도헨 Nov 16. 2023

<너와 나> : 꿈에서 나는 너였어

한참 늦은, 애도

0.

<D.P>에서 조현철(조석봉 역) 연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백상에서 상을 받은 후 그의 소감을 듣고, 그를 기억하기로 했다.

그가 만든 첫 장편영화 <너와 나>를 보고, 감독으로서 하는 말들을 듣고, 완전히 반했다.



1.

꿈 같은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시간이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구조도 내용도 꿈을 차용했기 때문이다. 감독이 직접 말하기로도, 꿈결 같은 느낌을 주려고 했다니까 말이다.



2.

꿈이 주요 소재고,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꿈인 이야기다.

하지만 그보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꿈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따라가기 어려운 영화였다.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다.

반대로 쉽기도 했다. 논리적으로 짜맞추고 빈틈을 메우려 하면 어렵지만, 그냥 받아들이면 됐다.

(크리스토퍼 놀런 영화와 반대의 어려움이라고 할까.)


탐정처럼, 냉정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어디까지가 실제 일어난 일이고 무엇이 꿈인지 파악하는 '나'는, 매번 브레이크가 걸려 난감해했다.

뜬금없이 어떤 장면들이 나오고, 이야기의 배열이 뒤죽박죽이고, 앞뒤가 연결이 안 된다고 느꼈다.


하지만, 또 다른 '나'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본 듯한, 아는 듯한 상황 안에 들어가 있었다. '새미'나 '하은'이 같기도 하고, '진식'이나 '조이'가 되었다가, '엄마'나 '아빠'나 친구들일지도 몰랐고, 그냥 그곳의 공기로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맥락과 경계가 허물어지는 이야기였다.



3.

많이 울었다. 내가 왜 우는지 모르고 울었다. 머리가 따라오지 못해서, 거꾸로 그걸 이해하려니 기이했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장면이 나오고, 맥락 없이 전개되는데, 내 이야기 같기도 하고, 내가 아는 이야기 같기도 하다. 있었던 일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분명히 그럴 법했는데, 말도 안되는 것 같기도 하다.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으나 내게 중요한 무언가를 자꾸 건드린다. 머릿속이 바쁘다. 뭔가 채 알아내기도 전에, 가슴이 느낀다. 뭔가 크게 잘못된 것 같아 불안해지기도 하고, 뭔가 소중한 걸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도망쳐야 될 것 같기도 하고, 돌이킬 수 없을 것 같고...



4.

2014년 4월 16일. 그날에 대해, 사실 나는 보통 사람과 다른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날의 날씨, 그 소식을 들은 장소, 그 순간 하고 있었던 일, 그때의 망연하고 무참한 기분 등을 사람들은 기억한다.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해마다 4월 즈음이 되면, 사람들은 침울해졌다. 딱 그날이 되면 더 그랬고, 그에 관한 글을 쓰거나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나는 조용히, 나의 아무렇지 않음을 숨기느라 조심스러웠다. 머리로는 슬퍼하고 힘들고 싶었으나,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잘 안 됐다. 기억도, 감흥도 없었다.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5.

그럼 그즈음 나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던가.

나는 둘째 임신 중, 입덧으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내 세계는 첫째로 가득 차 있었는데, 몸이 따라주지 못해 그게 제일 괴로운 나날이었다.


텔레비전도 없고, 간혹 라디오를 듣고, 신문으로 세상 돌아가는 걸 파악하는, 사실은 그다지 세상과 관계없이 살던 때였어도, 온 나라를 뒤흔든 소식은 내게도 당도했다. 충격적인 사고였고,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끔찍한 사고가 있었어. 수학여행 가던 아이들이 죽었어. 찬 바다에서. 살릴 수 있었는데, 멍청하고 무책임한 사람들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어.' 하고 끔찍해하다 말았다. 내 마음과 관심사는 달라지지 않았다. 내 영혼과 삶은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동티모르나 튀르키예의 지진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팔레스타인 폭격 소식처럼.


조금 다르다면, 그 소식에 힘든 주위 사람을 보아야 했다는 점이다.

어릴 때, 외할머니 장례식에서 엄마가 통곡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와 비슷했다. 엄마가 너무 슬퍼해서 마음이 아팠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건 그렇게 슬프지 않았다. 엄마가 슬퍼하니까 따라서 가슴이 아리지만, 그렇게까지 슬퍼하는 엄마의 마음은 모르겠어서 조금은 어리둥절했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슬퍼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여러 해가 지나도 그러한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내 마음과 그들의 마음의 간극에 멍했다.

'공감'이라는 걸 못하는 나를 탓하기도 했다.



6.

지난해 10.29 참사가 일어났을 때는 조금 달랐다.


충격적인 사고였고,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실시간으로 소식을 알았고, 뉴스를 계속 따라갔다. 슬프고 화가 났고,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도.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지내는 사람들을 보고, 거꾸로 충격을 받았다. 블로그나 유튜브를 볼 때도, 여전히 일상적인 얘기, 평소와 같은 주제만 말하는 사람들을 보고, 이래도 되나 싶었다. 

(하지만 내게 보이는 모습과 그들의 실제 삶은 다를 것이므로, 그렇게 쉽게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내 마음이, 모두에게서 나와 같은 마음을 찾고 싶었다는 뜻이다.)


다시는 할로윈은 즐기지 못할 거 같다.



7.

나는 이런 나를 보고 조금은 안도했다. (내가 사이코패스...는 아니구나. 우습지만 정말로 그랬다.)


내가 몇 년 사이 조금 더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된 걸까.

그보다, 내가 조금 더 '공감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거겠지, 스스로 답을 냈다.


덜 바빴다. 삶의 '여유'까지는 아니어도, '여백'이 있었다. 그래서 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

아무리 엄청난 드라마라도, 클라이맥스만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사람은 없다. 덕질도,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더 많이 느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일이 '내 일', '우리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야 했다. 아니 적어도, '남의 일'이라도 '남 같지 않은' 마음이 들어야 했다.

사고를 당한 사람이, 그 가족이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 나였을 수도 있었다는 마음. 그들의 얼굴에서 보이는 내 얼굴, 내 가족의 얼굴.



8.

영화는, 이 이야기가 세월호 이야기라는 걸 숨기지 않는다. 대놓고 '세월호'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조금만 지나도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20대 이상이라면 깨닫는다. 세월호 이야기구나. 저 아이들이, 저렇게 들떠 있다가, 좋아하다가, 준비하다가... 죽겠구나.


물론, 새미와 하은이의 사랑 이야기라고만 해도, 이야기는 완결성을 갖는 듯하다. 하지만 단순히 두 개의 층위로 나뉜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니까 세월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외국인이라든가), '오. 여고생 두 명의 사랑 이야기 참 잘 봤어'라고 한다면, 그렇게도 볼 수 있는 이야기라고 결코 동의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이토록 개인적이고 구체적으로 풀었을까 생각해본다. 얼핏 지루할 수 있게, 어쩌면 너무도 일상적인 장면들. 내가 아는, 내 옆집 이야기 같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

그래서... 진짜 살아 있는 것 같은, 정말 어딘가 존재할 것 같은 사람들.


이 영화가 세월호 이야기라는 걸 아는 순간(사전 정보로 알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모든 순간이 탄식이 된다. 소중하지 않은 순간이,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진다.



9.

꿈에서 깨어보니, 실제로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데, 내가 달라져 있을 수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그런 기분이었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애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게 시작일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