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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Nov 23. 2023

글쓰기에 관한 책 둘: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슬픔은 어떻게 글이 되는가>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0. 

어쩌다 두 책을 연달아 읽었다. 책에서 느껴지는 저자(김소민과 정지우)의 정서는 완전 다르다. 두 책은 정반대의 톤으로, 같은 이야기를 한다. 써야 하는 이유, 쓸 수밖에 없는 이유.


'글쓰기'를 다시 삶의 중심으로 두어보겠다고 다짐하는 내게, 신이 보내준 선물 같다.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주려고.



1.

 <슬픔은 어떻게 글이 되는가>는 지난 6월 한 온라인서점에서 북펀딩을 해서 알게 됐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임승수, 2014년 출판), <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김형수, 2015년. 같은 작가의 이전 책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는 2014년 출판)를 생각나게 하는 제목이었다. 앞의 책들 모두 줄 치면서 읽었던 기억인데, 그 비장한 제목에 지지 않을 수 있겠나? 하는 눈초리로 소개를 훑어보았다. 저자가 한겨레신문사에서 13년 기자로 일했고, 한겨레문화센터에서 글쓰기 관련 강의를 했다고 하니, 비장함을 걷어내고 건조하게 받아들인다면, 저런 제목을 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에서 낸 책을 구할 수 없었던 경험이 있는지라, 짧게 고민하고 바로 펀딩에 참여했다. 플랫폼 차이가 있는 건지, 결과물에 대한 반응이 좋아서인지, 이 책은 지금도 살 수 있다. 그래도 책 마지막 페이지에 박혀 있는 내 이름을 보는데, 기분이 괜찮았다. 그만큼 괜찮은 책이었다.



2.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슬픔은 어떻게 글이 되는가>를 읽다가 알게 된 책이다.


그 안에 인용된 여러 책들 중 몇 권을 적어두었다. 그중 하나였는데, 소개하면서 한 이야기에 동의가 되었고("<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에서 단문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대개 폭력적인 경험으로 글을 배웠다는 내용을 보고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제목도 마음에 들었다. 아마 그즈음 내가 그랬던 것일 테지.


도서관에서 찾아 책날개에 적힌 저자의 이력과 저서를 보고, 저자를 왜 이제야 접했지 싶었다. 빌려 읽는데, 줄을 칠 수 없어서 갈수록 갑갑했다. 옆에 두고 몇 번이고 펼쳐 보고 싶은 문장, 아니 그의 사유가 가득했다.



3.

두 책을 비교할 수밖에 없었는데, 둘의 온도와 정서와 스타일이 달랐던 게 재미있기도 했고, 유익했다. 그런데도, 이 책을 읽을 때 '이 사람 나랑 비슷한 구석이 있네...' 했고, 저 책을 읽으면서 '흠.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구만.' 했다.


나도 그렇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다양한 모습, 여러 층위가 있겠지. 그 수많은 부분 중 비슷한 조각을 찾아 맞추어보는 게 책 읽는 기쁨 중 하나임을 새삼 느끼는 시간들이기도 했다. 나는 그게 그렇게 소중하고 재미있다.



4.

김소민은 글쓰기와 씨름해본 사람의 마음을 안다. 정지우는 글쓰기로 구원 받아본 사람의 마음을 안다.

김소민은 날카롭고, 정지우는 묵직하다.

김소민의 글은 잠언 같고, 정지우의 글은 기도문 같다.

김소민은 S처럼 말하고, 정지우는 N처럼 이야기한다. (나의 오독과 오해라면 죄송..)

제목은 거꾸로, 김소민이 글쓰기를 좀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고, 정지우가 슬픔이 어떻게 글이 되는지 풀어낸 것 같다.


김소민은 글 쓰는 괴로움에 대해 투덜거린다 싶을 정도로 하소연한다.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고 잘 안 되고. 하다가 잘 안 되는 경우에 대해서, 그 의미에 대해서 아주 실질적인 경험으로 표현해준다.

정지우는 글쓰기가 주는 평온함에 대해 설파한다 싶을 정도로 강조한다. 쓰면서 잦아드는 불안과 분노에 대해, 명확해지는 막막함과 흐릿함에 대해 여러 비유로, 여러 사례로 설명한다.



5.

공통적으로는, 사람이 쓰면서 어떻게 달라지는지, 삶이 쓰면서 얼마나 나아지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말 질리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또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진짜 신기하게도 안 질린다. 나는 정말 안 질렸다.


무언가 간절히 원하고, 그걸 위해서 노력하고 싶은데, 잘 안 될 때가 있다.

그때 어떤 확신이 필요하다. 그 어렵다는 첫 발을 내디뎌야 한다. 때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툭 쳐주고 잡아끌어주고, 거기서 돌아가지 않고 같이 걷다가, 속도를 내도록 살짝 밀어주기도 하고, 속도가 나면 옆에서 같이 뛰어주면 좋겠다.

사실 내 안에 모든 게 있는데, 그걸 끌어내기 위해, 같은 말을 여러 번, 다른 버전으로, 질리도록 듣는 게 도움이 된다.


그렇다. 이 책들은, 분명 같은 메시지를, 계속 다른 버전으로, 다른 예를 들어가며, 강조점을 달리 해가면서 이야기한다. 나는 듣고, 듣고, 또 듣는다.



6.

글쓰기를 해야겠어. 아쉽지 않게, 미련이 남지 않게 저 끝까지 해보겠어.
그렇게 달려서 어떤 성취를 해내겠다는 게 아니라, 글 쓰는 몸을 만들겠어. 내 삶을 글 쓰는 삶으로 만들겠어. 누가 뭐래도.
왜냐하면...
자,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냐면...


그런 이야기가 필요했다. 내게.

그런 이야기를 계속 들으면서, 내 안에서 끌어내면서, 잠깐씩 웃고, 가끔씩 '아하' 하고, 줄곧 맞장구치면서, 책을 품에 안고 한 장씩 얼굴을 묻는 시간이 그렇게 좋았다.




+) 밑줄.


혹시 나는 글을 쓴답시고 쓰레기를 안고 씹고 맛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데 나는 '쓰레기'가 재밌다. /40

글쓰기는 공평한 데가 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 잘 쓴다. /85

거창하지만 당연한 글은 필자가 부풀어오른 자신의 자아상에 바치는 경배다. /112

성취에 대한 글뿐 아니라 슬픔에 대한 글도 자기과시일 수 있다. (중략) '곱게 자란 네가 인생에 대해 뭘 아니.' 이런 태도로 기술한 슬픔은 자기에게 보내는 박수다. /124, 125

솔직하기로 작정하면 꽉 막혔던 글이 뚫리기도 한다. /125

내가 나를 내 방식대로 표현할 수 있는 한, 이 삶은 내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잠시일지언정 아무것도 부럽지 않다. 우리는 자신이 되려고 글을 쓴다. /196



글을 쓰는 살마마다 글쓰기를 대하는 태도는 제각각이다. 어떤 작가들은 백지 앞에 선 공포가 얼마나 엄청난지를 이야기한다. 알코올의 도움 없이는 한 자도 쓸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글쓰기란 알코올과 피를 섞어 만든 잉크로 써나가는, 공포와 아픔을 동반하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에게 글쓰기는 춤이고, 여행이고, 자유로움이다. 백지는 내가 가장 자유롭게 마음껏 춤출 수 있는 무대와 같다. 백지와 마주할 때는 늘 어떤 세계가, 그 세계를 대하는 태도와 접속한다.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러한 태도로 어떤 세계로 들어서는 일이다. /89-90

만약 그렇게 무언가를 계속해나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결국에 남는 것은 '계속한 사람'이라는 것, 결국 이기는 것도 '계속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헛수고 그만해, 더 온당한 길을 찾아가.' '그는 이제 슬럼프에 빠졌어, 그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아, 그는 망가지고 있어.' 하지만 그런 말들에 귀 기울이지 말아야 할 시간이 삶에는 있다고 믿는다. /101

그런 식으로 계속 글을 써나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나 가치 혹은 효용이 있는지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곤란할지도 모른다. (중략) 그런데 세부적인 효용과 별개로 글쓰기 행위, 글쓰기의 반복, 계속 비웠다 차오르는 일이 그 자체로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그저 하는 일이다. 매일 아침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것처럼, 흥얼거리고, 수다를 떨고, 산책을 하는 것처럼 그저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저 하다 보면 삶이 좋아진다. 그저 하다 보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 때로는 글쓰기 자체가 좋은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좋아서 하는 일이 삶을 배반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글 쓰는 사람은 그래서 계속 쓰게 된다. /109

내가 쓰는 글이 누군가에게 닿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이다. 마치 어느 대륙에서 출발한 돛단배가 망망대해에서 작은 무인도를 만나는 것처럼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그에 관한 합리적인 이유를 찾긴 어려울 수도 있다. 내 글이 세상의 다른 모든 글보다 아름답고, 뛰어나고, 의미심장해서는 아닐 것이다. 오늘 세상에 나온 글 중에는 분명 내가 쓴 글보다 가치 있고 빛나는 글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글 대신 내 글이 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일은 우연에 아주 큰 부분을 빚지고 있다.
그렇다면 역시 아무렇게나 글을 쓸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 번의 닿음이 기적이고, 절실한 우연이자, 절묘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정갈한 마음으로 내가 믿는 진실을 온전히 담고자 애쓰게 된다. /147

자신의 오랜 실패나 절망, 상처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을 한 번 털어놓고 나면 어째서인지 그래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듯하다. 우리는 내 마음에 있는 상처들이 결코 남들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치부 같은 것이라 자기도 모르게 믿곤 하지만, 사실 이야기되어도 괜찮은 것임을 어느 날, 벼락 맞듯이 깨닫는 날들이 있다. 이후는 마치 다른 세계가 열린 것처럼 기이하게 다가오곤 한다.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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