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조차 구원하는
0.
<긴긴밤>과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에 이어, 루리 작가의 신작 그림책 <메피스토>를 읽었다.
어떤 한 존재를 발견한 느낌이다. 앞으로 이 작가의 책은 모조리 읽으리.
이 작가를 '좋아하게' 된 게 아니다. '믿게' 되었다.
1.
'이야기'를 건너다보는, 내려다보는, 둘러보는, 그런 경험이 아니다.
도대체 뭔 이야기래? 하면서도 빨려들어간다.
무아지경, 그런 상태가 되는데, 지금까지 접한 어떤 이야기와도 비슷하지 않아서,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설렌다. 그 찰나에, '나'가 느껴지기는 한다.
하지만 빨리 읽을 수가 없다.
그림에 숨겨놓은 무언가를 찾느라 그렇기도 하고, 문장은 단단하게 느껴질 정도로 꽉 차 있는데, 문장과 문장 사이는 헐겁기 때문이다. 나 같으면 열 마디, 스무 마디 보태서 설명할 텐데, 그런 생각이 스치곤 한다.
그러니 책을 보며 머리도, 마음도 바쁘다. 느리게 바쁘다.
2.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이야기들을 다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첫 책인 <브레멘...>은 보통의 그림책들과 조금은 비슷하다. 어쨌든 유쾌하게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고, 알아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은 어떨지 궁금했다. 읽어보라고 했다.
열두 살 첫째는, 모두 후딱 읽었다. <긴긴밤>을 보고는 울었다. 나머지 두 권에 대해선, 재미있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열 살 둘째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긴긴밤>과 <메피스토>를 보고 울었다. <브레멘...>은 재미있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일곱 살 셋째는, <긴긴밤>은 결국 다 읽지 못했다. 언니들이 모두 재밌다며 울기까지 해서 애써 보았으나, 반쯤 읽다 너무 길다며 울었다. <브레멘...>을 읽으면서는 중간중간 이게 무슨 말이야, 물으며 읽었고, <메피스토>는 재미있게, 천천히 두 번(처음엔 혼자, 두 번째는 나와 같이) 읽었다.
어른을 위한 동화인가, 하고 묻게 된다. 하지만 아이들도 재미있게 읽긴 한다는 건, 나름대로 느끼고 생각했다는 것일 테다. 시간이 지나 또 읽으면, 분명 다른 게 보이고 다른 걸 느낄 거고. 나 역시 그럴 것 같다.
<어린 왕자>가 떠오른다. 그런 이야기다.
궁금하다. 이런 이야기를 짓는다는 건, 생각을 깊게, 많이 하고, 치밀해야 가능한지, 아니면 이런 이야기를 짓는 사람의 내면세계가 그만큼 특별해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든 노력한다고 될까 싶은... 그런 이야기들이다.
3.
책 마지막에 나오는 '작가의 말'은 보통, 바로 읽지 않는다. 이야기에 푹 빠져 있다, 갑자기 확 끄집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둘째와 셋째를 양 옆에 끼고 읽다가, 눈물을 삼키려고 바로 읽었다. 이런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도대체 무슨 말을 덧붙였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런데 오히려 작가의 말을 읽다가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줄줄.
이런 책은 또 처음.
4.
왜 세상이 이럴까, 종종 생각한다. 왜 이렇게 불완전할까, 고통과 불행이 가득할까. (신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을까. (인간인 우리가 잘했다면 달랐을까? 인간이 잘하면 달라질까?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런데 가끔은, 이해할 것도 같다. 애써 신의 입장에 서보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쁜' 걸 경험하지 않으면 '좋은' 걸 모른다. '맛없는' 걸 먹어봐야 '맛있는' 걸 알고, '지루해' 봐야 '재미있는' 게 무엇인지 감을 잡는다. '없어봐야' '귀한' 걸 깨닫고, '다쳐봐야' 안 다치게 '조심한다'. '행복'도 '완전함'도 '빛'도, 그 반대의 상태가 없다면, 그 자체로는 파악할 수 없는, 아니 존재할 수도 없는 개념이다.
진짜 ‘선택’, 진정한 의미의 ‘자유의지’는, 선택지에 거지 같은 것도 있어야 하고, 선택의 결과 모든 걸 잃어버릴, 망할 가능성이 실재해야 한다.
그럼 일부러 기쁘게 하려고 아프게 하나? 병 주고 약 주나?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고약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영화 <매트릭스>에서 말하듯이, 완벽한 세계를 만들어, 모두가 행복하기만 했을 때, 사람들은 이게 '가짜'라는 걸 깨달았다. 왜일까?
나의 열 살짜리 둘째가 얼마 전 어린이 동화를 다 읽고서, '시시했다'고 평했다. 이유를 물으니, 너무 쉽게 모든 게 풀렸다고, '어려움'이 있어야 재미있는데, 하고 답했다. 겨우 열 살짜리도 깨달은 ‘재미’란 게 뭘까?
여러 가지로 불안한, 고달픈 40대로서, 앞으로 '모든 게 잘 됐으면' 하고 단순히 바란다. 하지만, 내가 태어나기 전, '어려움도, 괴로움도 없는 모든 게 마음대로 되는 삶'과 '보통의 삶' 중 선택할 수 있었다면, 나는 과연 전자를 택할까?
무조건 이기는, 아무 장애물도 없는 게임을 내가 할까?
주인공도, 조연도, 아니 등장인물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하기만 한 이야기를, 내가 과연 좋아할까? 아니 읽기나/보기나 할까? 아니, 궁금해하기나 할까?
5.
그러게, 왜 '이야기'는 결함 있는 자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으로 만들어질까? 그러니까,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패자, 약자, 고통 받는 자의 것이다.
아니면, 거꾸로, 패자, 약자, 고통 받는 자만이 이야기를 만드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결국 이기고 이야기를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메피스토>에서, 개와 소녀는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다. 가진 것도 없고,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노력했으나 끝내 고되고 외로운 삶이다. 그들을 구원한 건... '이야기'였다. 마음껏 만든 이야기.
그러니까 그건 '사실'조차도 아니었다. '가짜'였다. 가짜 이야기가 삶을, 인간을 구원할 수 있나?
6.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나서, 내 마음에 줄곧 남았던 물음은 이것이었다.
결국 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이야기를 만드는 것뿐인가?
실제로는, 영화에서 보여준 뒤의 역사는 더 처참한데, 고작 이야기를 만들었구나. 모든 걸 빼앗기고 완전히 망가지고 망해버린 사람들이 가진 단 하나의 무기가 겨우 '이야기'였구나.
그 이야기로, 30여 년이 지나 영화화 되어, 많은 (심지어 그때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마음에 불을 놓았지만, 사실은 달라진 것도, 달라질 것도 없지 않나...? 친일파처럼 전두환 일당도 지금까지 돈도 권력도 손에 쥐고 떵떵거리며 사는데?
돈도 권력도 개뿔도 없는, 있었다가도 빼앗긴 사람들은, 골방에 앉아서 이야기나 짓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게 사람들 마음에 영향을 주어 세상을 바꾸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당연히 내가 패자 쪽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이 상황이 너무 불쾌하고 우습고 슬펐다.
7.
<메피스토>를 얼마큼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쯤은 깨달았던 것 같다.
소녀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은, 개가 구원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소녀가 멋진 가짜 이야기를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게라도 할 만큼, 아프고 슬프고 괴로운 일을 지우고 다시 이야기를 써야 할 만큼, 소녀가 개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악마였던 개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소녀가 지지 않은 것은, '이야기를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 만큼 '개를 사랑했기 때문'인 것을, 소년이 된 악마와 함께, 나도 깨달았다.
8.
덕분에, 내게도 조금은, 구원의 문이 열리지 않았을까?
만든 이야기뿐 아니라, 현실의 삶에서도,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는 실은 별게 아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움직이고, 혹은... 계속 살아가도록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은, 이야기나 삶에 담긴 '사랑', '선함‘, ’아름다움', '지지 않는 마음', '믿음', ‘(은혜든 원한이든) 갚고 싶은 마음‘… 그런 것들이니까.
그런 것들이 생겨나려면, 지고 빼앗기고 안 풀리고 슬프고 억울한 사연이 필요하다는 걸, 이기고 많이 갖고 마음대로 되고 웃는 일만 있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설령 만들었다 해도, 그런 건, 시시하지 않을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