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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Dec 13. 2023

소설, 소설가, 그리고 진짜 욕망

장강명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그리고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0.

장강명의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을 읽고, 이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 책들을 탐독하는지, 나는 알 수 있었다.



1.

장강명의 에세이를 좋아한다. 처음 그의 책을 읽을 때 바로 알았다. 내 과다, 이 사람.

그가 쓴 비소설 책 7권 중 4권을 읽었다. <책, 이게 뭐라고>, <책 한번 써봅시다>, <당선, 합격, 계급> 그리고 이번 책. (<당선, 합격, 계급>은 르포) 읽을 때마다 편하고(내게 걸리는 게 없는 말하기 방식이다. 딱 자기의 생각만큼만, 감정만큼만 말한다), 지루하지 않으며('신선'하거나 '재미'있어서라기보다 ‘유익’하다는 점에서. 이 사람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생각과 주장이다), 같이 정색하고 냉철했다가 나의 중심추를 찾는 기분이 든다('누가 뭐라고 해도, 누가 기분 나쁘다 해도 상관없어. 난 진짜 내 이야기 할 거니까.' 그런 기운을 내뿜는데, 나의 기운이기도 하다).

재치나 위트의 면에서 보자면, 그게 자기의 것이 아닌 걸 아는 절제미를 느낄 수 있다. 그래도 가끔 '피식' 웃게 하는데, 딱 그 정도라 좋다.


소설은, 그가 쓴 단편 포함 20여 권 가까운 책 중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아니, 읽지 못했다. 두 권 정도 시도해 보았으나, 별로 진도가 나가지 않아 덮었다. (장강명 소설가님, 죄송합니다. 다시 시도해볼 예정이에요..)



2.

하루키의 책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대학생 때, 그러니까 20여 년 전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를 읽고, 다시는 읽지 않기로, 무언의 다짐을 한 게 아니었나 싶다. 책 내용도, 이 책을 좋다고 하는 사람도 모두 이해가 안 됐다. 모두가 좋다니까, 괜히 삐딱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같다.


그러다 최근에, <아무튼, 하루키>를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저자 이지수가 좋아하는 하루키는 충분히 납득이 됐다. 뭐든 그의 책을 읽어봐야겠다, 하고 있는데 마침 장강명이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에서 하루키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언급했다.


옳다구나, 하고 빌려서 읽는데 첫 장 '소설가는 포용적인 인종인가'에서 벌써 무릎을 치고 말았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다.


보통 어떤 직업군에서도 '영역 배타성'이 있는데, 소설가는 그런 게 별로 없다. 그러니까, 가수가 연기를 한다거나 소설가가 화가로서 작품을 발표한다거나 하면 원래 그 직업군 안의 사람들은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긴다. 하지만 소설가들은, 어떤 직업군의 누가 소설을 쓴다 해도 '네가 감히 소설을 써?' 하는 태도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누구든 쓸 수 있는 영역이라 생각하고, 게다가 환영하기도 하고. 자신(하루키)도 마찬가지.

그런데 그 이유가, 소설가들이 특히 마음이 넓어서가 아니고, 누구나 한 번쯤, 혹은 잠깐은 소설을 쓸 수 있어도, 심지어 소설가들이 놀랄 만큼 잘 쓸 수 있어도, 진짜 '소설가'가 아니고서는, 결국엔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10년, 20년, 그 이상... 소설을 지속적으로 쓰고, 소설가로 먹고살고, 소설가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어떤 특별한 것'이 점점 필요해진다.


그럼 어떤 사람에게 소설 쓰는 일이 맞느냐. 너무 머리가 좋은 사람에겐 적합하지 않다. 너무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 특출하게 지식이 풍부한 사람에겐 맞지 않다. 왜냐하면, 소설가는 자신의 의식 속에 있는 것을 '스토리'로 치환해서 표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원래 있었던 형태와 거기서 생겨난 새로운 형태 사이의 '낙차'를 통해서 뭔가 말하려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상당히 멀리 에둘러 가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자기 머릿속의 메시지가 선명하고, 그것을 곧장 언어화 할 수 있다면, 혹은 지식이 풍부해서 '스토리'라는 애매모호한 '용기(容器)'를 사용하지 않아도 남을 설득할 수 있다면, 굳이 소설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 회전이 빠르고 총명한 사람들이 재기 넘치는 소설 한두 편을 쓰고는 '아, 소설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다른 분야로 옮겨간 게 아닐까 싶다고. 소설 쓰는 거보다 다른 일을 하는 게 효율적이겠다, 하면서.


하루키의 매력은, 술술 잘 읽힌다거나 독특한 문체가 다가 아니었다. 듣고 보면 아, 정말 그렇구나! 그제야 깨닫는 특별한 생각을 너무도 쉽게 흡수하게 한다.



3.

그러니까, 지금까지 나는 '어떻게 하면 소설가가 될 수 있지?' '내가 과연 소설가가 될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하면 소설을 잘 쓸 수 있지?' '내가 잘 쓸 수 있는 소설이 있다면 뭘까?' 그런 생각에 골몰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책 전체를 통해, 특히 이 첫 번째 장을 읽으면서, 나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게 됐다.


일단 나의 욕망에 대해서.

나는 내 안에 '스토리'로 치환할 만한 무언가가 있는가? 그것을 단 하나의 (멋진) 소설로 쓰고 싶은 것인가? 그러고 나면 후련해지고 뿌듯해져서, 자리를 훌훌 털고 진짜 내 영역을 찾아갈 것인가?

아니면, 살다 보면 끊임없이 고이는 무언가를, 10년이고 20년이고 계속 '스토리'로 만들면서 살고 싶은 것인가?


그리고 나의 적성 혹은 재능에 대해서.

나는 내 의식 속에 있는 것을 '스토리'로 치환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인가, 아니면 비효율적이라고 느끼는 사람인가? 이 에둘러 가고,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을, 분명하고 적확한 표현으로 깔끔하게 전달하는 것보다 잘하고 좋아하는가?



4.

낙서든, 일기든, 시를 흉내낸 무언가든, 글을 쓴다는 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 내게 본능적인 도구였다.

글쓰기는, 잘 쓰거나 못 쓰는 문제일 수는 있어도(남이 뭐래도, 나 스스로는 대략 만족했다. 흩어지고 엉킨 생각을 정리해 표현해냈다는 점에서) 어려운 일도,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소설'은 쓰고 싶은데, 써지지 않았다. 한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그러다 놀랍게도, 내가 우울증에 걸렸을 때 소설이 써지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쏟아졌다.


거꾸로 그때는 에세이가 써지지 않았다. 그것 역시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썼던 글들은 굳이 분류하자면 에세이였는데, 갑자기 안 써질 일이 뭔가. 하지만 안 써지던 소설을 쓰느라, 에세이 같은 건 안 써도 그만이었다. 그리고 사실 '에세이'라는 게 우습게도 느껴졌다. 내 경험을, 내 생각 따위를 글로 남길 이유가 있나? 그게 뭐라고. 다시는 에세이 같은 건 쓸 생각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우울증이 나으면서 반대의 상황이랄까, 원래 대로랄까, 돌아갔다. 에세이는 쉽고, 소설은 어려웠다. 뭐지, 이건.



5.

하루키의 설명을 들으며, 아하, 싶었던 게 바로 이런 점이었다.


내가 우울증이었을 때, 나에게 가장 뚜렷하고 특징적인 상태는 '흐려진 분별력과 느려진 판단력'이었다. 무기력증, 모든 게 재미없음, 감정 조절 어려움 등의 증상도 당연히 있었고, 모두 내 일상을 힘들게 하는 것이었지만, 이런 것들은 살면서 때때로 스쳤던 느낌이었다.

하지만, 생각의 속도가 느려지고 불명확해지는 것은 나로선 너무나 생소한 느낌이었다. 나는 언제나 모든 것이 명료한 사람이었고(너무 명료한 것들이 경합할 때 더 나은 것을 고르는 과정에서 머뭇대긴 했어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건대, 생각의 속도도 결론을 내는 속도도 빠른, 때로는 너무 빠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속적인 수면부족(그때 나는 하루에 세 시간도 안 잤다)의 영향이었을 텐데, 그게 고장나버렸다. 본능적으로 기계적으로 어떤 것에 대해 반응은 했지만, 논리적이고 총체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건 어려웠다. 그래서 '옳다'고 주장하는 것들에 대해 화가 났다. 어떻게 알아? 확실해? 내가 스스로 판단해서 옳고 그름을 따지기 어려우니 그런 당위를 주장하는 것 자체에 질렸다. 그러니 내 안에 떠오르는 생각을 전개시키고 확장시키고 정리하는 것은, 당연히 더 어려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인간이 서로에게 할 수 있는 건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게 비판적인, 논리적인 사고가 고장나고, 생각이든 표현이든 느리고 에둘러갈 수밖에 없을 때, 그때에야 가능했던 것이다. 소설 쓰는 일이.



6.

장강명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가라는 직업'에 관련한 여러 크고 작은 이야기들, 사적이고 공적인 이야기들, 실용적이거나 꿈같은 이야기들 모두, 나로선 모두, 그냥 재미있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꿀 묻은 글처럼 읽으며, 마음 한쪽에서 계속 생각했다. 내가 어떤 직업의 이야기를 이토록 세세하게 알기 원할까? 이렇게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재미있어할까?


먼저 읽었던 김소민의 책에서 밑줄 그었던 어떤 부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질투는 의욕을 꺾기도 하지만 장점도 있다. 내 욕망이 무엇인지 명확히 말해준다. 물론 나는 30년 된 아파트에서 바퀴벌레랑 사는데 친구가 새 아파트로 이사 갔다면 부럽다. 나는 한 삽 한 삽 삽질하듯 돈을 버는데 친구가 억대 연봉 받는다고 하면 부럽다. 그런데 이게 진짜 질투가 아니라는 건 안다. 이런 부러움은 집에 돌아와 개랑 공놀이 한 번 하고 나면 사라진다. 그러나 경악할 만한 작가들의 글을 보면 나는 정말이지 배가 아프다. 오래오래 아프다. 그러니까 바로 그게 내가 욕망하는 것이다. 대체 이런 상상력과 문장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지?

/김소민, <슬픔은 어떻게 글이 되는가> 76쪽


소설을 쓰기 위해 다시 우울증으로 돌아가서야 안 될 일이고... 멀쩡하고 자연스럽게 뇌를 다르게 쓸 수 있는 방법도 있겠지. 우리의 훌륭한 뇌는 가소성이 있으니까, 아니 그전에 있는 능력도 다 쓰지도 못하고 있다니까.


나는 내가 가진 어둠이 좋다. 흉터처럼 남은 망가짐조차 소중하다. 불화할 수밖에 없는 성정이나 '언어'나 '이야기'에 대하여 저절로 생긴 타협할 수 없는 기준을 엉뚱한 데 쓰고 싶지 않다.


장강명이나 하루키가 가진 소설가로서의 장점이 내게 있을런지 모르겠다. 그들이 했던 노력들을 내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루키가 말한 '어떤 특별한 힘에 의해 소설을 쓸 기회를 부여 받았고, 행운도 따랐다'는 그 일이 내게도 일어날지,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경우인지 모르겠다. 장강명처럼 '돈하고 상관없이 이 직업 되게 뿌듯해요. 맞는 사람한테는 정말 잘 맞아요'라고 말하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결국 어떤 종류의 글을 쓸 사람인지 정말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답을 알고 싶고, 그 답을 아는 방법은 계속 쓰는 것밖에 없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다. '에세이'만 써지는 또렷한 판단력으로 말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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