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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Dec 30. 2023

<길위에 김대중> : 추앙받는 자의 얼굴에 대하여

이 얼굴의 차이를 본 것만으로, 충분히 값진 시간이었다.

0.

'영화적'이고 '영화다운' 것이 뭘까. 나는 그것을 정의할 위치에 있지는 않지만, 가끔 그런 표현을 쓴다. 어떤 이야기 혹은 메시지를 소설이나 연극 등 다른 매체와 다르게, 그것들이 하기 어려운,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해냈을 때 감탄하면서 말이다.


이를테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를 볼 때 '영화로 얻을 수 있는 최대치의 즐거움'을 맛본 것 같아 '영화적'이라고 생각했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 나서는, 어떻게 이렇게 '소설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싶어, 다른 의미에서 '영화답다'고 생각했다.


나는 <길위에 김대중>을 보고, 위인전 혹은 자서전, 그러니까 '전기'의 말하기로 만든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한편으로는 '영화적'이지 못하다.



1.

돈을 내고 영화관이라는 공간에 앉아 커다란 화면을 마주할 때, 우리가 기대하는 건 뭘까? 그러니까 각자의 집에서, 웬만한 크기의 TV로, 자세도 먹는 것도 화장실 가는 것도 마음대로 편하게 볼 수 있는데 말이다.

물론 나 역시 대부분이 그렇듯, '굳이 영화관에서 봐야 하나' 고민스러울 때 보통은 스펙터클에 압도될 만한지 따진다.


하지만 언젠가 이동진 평론가는, 독립영화 같은 진지한 사회드라마 혹은 예술영화일수록 극장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몰입해서 보지 않으면 지루해지고 (영화가 주는 감흥 혹은 메시지를) 체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었다.


줄곧 이어지는 내레이션, 오래된 자료화면(심지어 정지화면도 많다)과 재연 장면으로 채워진 다큐멘터리인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영화관에서 봐야 할 영화다.



2.

어떤 영화가 영화 자체의 재미보다 영화가 가진 의미 때문에 '봐야 할' 영화로 분류될 때, 영화의 재미는 보통 반감된다. 그렇게 영화 자체에서 힘이 뻗쳐 나가는 게 아니라 바깥에서 힘을 받아 영화가 보여질 때, 영화는 스스로 약해지는 것 같다.


나는 <길위에 김대중>이라는 영화를 텀블벅에서 후원할 때부터, 실제로 연말의 시간을 내어 보러 갈 때, 또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노파심을 갖지 않았나 싶다.


이 영화가 영화적으로 훌륭하면 좋을 텐데. <서울의 봄>처럼 영화 자체가 재미있어서, 영화의 힘으로 사람들의 마음과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거꾸로 사회의식이나 역사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우리가 '봐줘야 할' 영화가 되어버리면 안 될 텐데.


그렇게, 영화가 오히려 약해지고, 김대중이란 인물의 가치가 훼손될까 봐 나는 긴장했다.



3.

아직 시사회가 이어지고 있고, 1월 10일이면 일반 영화관에서 개봉한다.


관객의 수로 평가되는 상업영화로서, <길위에 김대중>이 어떤 '성적표'를 받게 될지 나는 많이 궁금하다.


그러니까, 짜임새 있는 이야기든 오감을 압도하는 스펙터클이든, 영화관에서 볼 만한 재미있는 영화로 사람들이 수용할지 궁금하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애와 철학, 그가 받은 온갖 인간적 수모와 정치적 핍박, 그것을 견디고 이겨내며 '어떻게 똑똑한 정치인이 인간적인 정치인이 되었는지' 풀어놓은 이야기를,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의미 있게, 진지하게 받아들일지, 정말 궁금하다.  



4.

나로서는, 이 영화의 이야기 방식이 편했다. 그림보다 글이 쉬운 사람, 뒤죽박죽 상징과 은유가 난무하는 이야기보다, 논리적이고 사실적으로 차근차근 전개되는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쉬운 사람이라면 나와 비슷할 것 같다.


그렇다고 밋밋하거나 차가운 영화는 아니다. 지루할 틈 없이 때때로 한숨을 내쉬고 울컥해하면서 몰입해서 봤다. 그게 이동진 평론가가 말한 극장 버프를 받아서인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영화관에서 보길 잘했다고 여길 만큼 좋았다.



5.

확실히 영화 <노무현입니다> 같은 휘몰아치는, 바람에 올라타는 흥분과 카타르시스는 없다. 그것은 연출이나 각본의 문제이기보다는, 김대중이라는 인물, 그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꽤나 특출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사회적으로 반짝 성공했다가, 흔하기도 하고 제법 눈여겨볼 만한 포부를 가지고 정치인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녹록지 않다. 개인적인 불운도 닥친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끈기 있게 도전한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긴다.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도 많아진다.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기도 한다. 그럴수록 눈엣가시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주류도, 권력자도 그를 치우려고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주저앉기는커녕 자란다. 의지와 세력뿐 아니라, 내공도 정치철학도 용기도 꿈도 품도... 그렇게 짓눌리고 짓밟히면서 성장하는 시간이, 그런데 너무나 너무나 길었다.


만약, 김대중이 1997년이 아니라,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면 어땠을까? 가정에 의한 상상이지만, 그 시기 국민들의 억눌림,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견할 만큼 이기기 어려운 대결이었기에, 어쩌면 그 누구보다 더한 흥분과 감동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싶다. 역사에도, 우리 국민에게도.


하지만 실제로 김대중은 그때 아쉽게, 아깝게 진 이후로 너무 긴 세월이 흐른 뒤에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 역사를 썼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긴 세월 동안 명실상부한, 강력한 카운터 파트로서 대접받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를 충실하게 따르는 정치적 동지와 지도자로 삼고 싶은 많은 국민이 있었던 것과 별개로, 그는 정치인으로 사는 내내 전방위적인 박해를 받았다. 우리나라 현대사에 김대중보다 더 심하게 박해 받은 인물이 있을까? 더구나 그는 같은 진영에서도 오랫동안 제대로 환영 받고 추대되지 못했다.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 본 뉴스에 김대중은 늘 '거목'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그런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이토록 외면 받고 오해 받고 주류로부터 따돌림 받다가 필요에 의해서 불리는 삶이 길었는지 몰랐다.)


그러니까 영웅서사의 구조대로 말하자면(개인적인 성장을 이루는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을 작법서에서는 ‘영웅'이라 부르기도 한다), 태어남-부름-모험-역경-귀환에서 '역경'의 시간이 길어도 너무 길었다. (강도도 셌고 그만큼 주인공도 강해지긴 했지만) 지지자들은 너무 오래 기다렸고, 그사이 지치고 타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가 돌아와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김대중이나 지지자들은 승리의 포효나 환호보다는 탄식과 기쁨이 뒤섞인 눈물을 지어야 했을 것이다.


내게 이 영화는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먹먹한 색채였다.



6.

무엇보다도, 내게 <길위에 김대중>은 '추앙받는 자의 얼굴'로 기억될 것 같다.


나는 박정희나 전두환을 동영상으로 본 적이 별로 없다. 말하는 모습도, 목소리도 이 영화를 통해서 비로소 제대로 접했다. 아는 얼굴이기에 익숙했지만, 신선할 정도로 낯설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어떤 얼굴이 겹쳤다. <나는 신이다>에 나온 교주들의 얼굴이 문득 스친 것이다. 그 소름 돋는, 구역질 나는 끔찍한 이야기들을 꿋꿋이 보며 내가 발견한 것이 있다.


교주들은 절대권력을 얻으면 하나같이 돈을 자기 멋대로 쓰고, 여자를/남자를 꼴리는 대로 범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끊임없이 세뇌하는데, 너희들은 못나고 부족하고 죄인이고 '나'는 완전하고 대단하고 신이다, 그러므로 생각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내 말대로 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물론 괴이하지만 그럴 법한 행태인데, 내가 의아했던 점은, 자기를 드높이기 위한 (가무를 포함한) 행사를 벌이고, 그 한가운데서 주목 받으며 진심으로 좋아하는 그들의 모습이었다.


유아적이고 유치한 자기애적 욕망에 우습기도 했지만, 그들은 그게 정말 필요하구나 싶어서 안쓰럽기도 했다. 뭇 인간들이 자기를 올려다보며 웃고 울고 벅차하고 칭송하고... 그런 것을 즐길 뿐 아니라 필요로 하는 그들은 결국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 것은 얼토당토않다는 듯이, 자신을 추앙하고 칭송하는 사람들을 자기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불쌍하고 미천한 존재로 만들어버리고, 이 대단한 '나'가 구원해주어야 마땅하지, 하고 자신들이 휘두르는 모든 악을 합리화하고는, 스스로 대견해서 흡족한 얼굴이었다.


박정희와 전두환, 그리고 김대중은 대통령이라는 최고위직에 올랐다는 공통점 외에, 수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는 어른이 되기 전에도, 뉴스에 관심을 갖기 전에도, 김대중이 자신을 향한 대중 앞에서 손을 흔드는 장면을 종종 보았다. 그리고 영화의 예고편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 특히 광주의 사람들이 김대중을 (덕질하는 연예인에게 하는 정도로) 온 마음을 다해 열광하고 환호하는 장면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군집한 대중의 눈, 외침, 손짓 등과 그들을 내려다보는(위치상 그럴 수밖에 없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얼굴이 나올 때, 그들의 눈빛과 표정에서, 미묘하게 교주들의 얼굴이 겹쳐졌을 때, 이성 한쪽에서 어떤 경보음이 울렸다. 뭐가 다른 건데, 하고.


나는 김대중의 얼굴을, 눈빛과 표정을 살피고 살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서 내가 본 것은, '이 상황과 스스로에 대한 흡족함'이나 '자신을 향한 추앙만큼 대단해지는 나'가 아니라, '자신을 향하고 있는, 자신이 대신 이루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꿈과 열망을 보려는 눈'이었고, 그래서 스스로 다시 한 번 묻는 '내게 그런 자격이 있는가' 하는 의심과 '그럼에도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겠다'는 결기였다.

김대중은 물리적으로 그 앞에 모인 대중을 내려다보고, 연설을 통해 인식을 깨우치려 하긴 했어도, 국민을 자기보다 못한 존재로서 불쌍하게 여기거나 자신이 높아지기 위해 필요한 비인격의 도구로 여기지 않았다. 실제로 여러 번 말했듯이, '국민이 위대하다'고 여겼을 뿐 아니라 의지했다.


나는 이 얼굴의 차이를 본 것만으로, 이 영화를 보는 시간이, 이 영화가 값지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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