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았다. 너무 웃기는 책이다.
이 책은 시대의 흐름 때문이건, 필연적인 과정의 결과이건 '이쯤에서 퇴장하겠습니다'라는 작별 인사도 전하지 못한 채 사라져야 했던 것들에게 보내는 뒤늦은 인사입니다. 이미 인사를 받아줄 대상은 모두 사라져 홀로 손을 흔드는 꼴이라 조금 서글프지만, 산다는 것은 대체로 그런 법이지요. /11쪽
0.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은 제목도 그렇고 서문도 그렇고, 얼마간 '서글플' 줄 알았다.
그래서 나도 내 인생에서 그런 조각들을 그러모으겠다는 마음으로, 덩달아 서글픈 기운으로 읽어나갔다. 그러다 어떤 부분에서 '낄낄' 웃음이 터졌다. 그러다 키득대고, 그다음은 폭소, 그리고 또...
반쯤 읽었을 때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 책은 너무 웃기는 책이다.
1.
자기 전에 읽을 때 특히 좋았다. 남은 에너지가 없을 때, 에너지를 모으고 싶지도 않을 때, 가벼워지고(경망 X, 경쾌 O) 싶을 때. 이만큼 읽고 자자고 책을 덮으면, 알게 모르게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리고 왠지 내 삶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곤 했다.
2.
김보통의 책은 <아만자>가 처음이었다. 암 환자에 관한 단편소설을 쓰다 알게 됐다. (아홉 살이던 딸이 먼저 읽을 정도로) 잘 읽히고, 재미있다. 빨리 넘어가지만, 마음에서 잠기는 게 있다. 다른 책과 다른 묘한 정서가 있었다. 내용 때문인가, 했었다.
3.
<D.P>(원작 만화의 저자이자, 공동 각본)로 김보통을 다시 접하고, 김보통에게 부러운 마음이 생겼다. 이런 식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란 말이지, 하는. 원작을 읽었다. 역시 잘 읽히고, 재미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에 지루함도, 조급함도, 시시함도 없다.
그런데 '내가 아주 재밌는 이야기를 해줄게' 하면서 보이는 태도가 '진짜 재밌지? 나 대단하지?'도 아니고, '나는 쳐다보지도 말고 이야기에 빠져 봐.'도 아니다. '재미...있어? 사실 내가 하고픈 말이 있는데... 내가 보여주고 싶은 건...' 그렇게 조심스럽게, 그렇게 가만히, 나를 압도하지 않고 조곤조곤히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의 태도가 좋았다. '약자를 보는 시선'이 아니라, '약자로서 보는 시선'이 좋았다.
4.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을 읽으면서 내가 계속 생각한 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책에서 느껴지는 그의 '정서가 좋다'는 것이었다. 글씨체나 걸음걸이를 보면 여지없이 알게 되는 그 사람스러움이 있다. 말투나 어조는 너무 직접적이라 오히려 착오를 일으킨다. 글도 역시 내 쪽에서의 상(像)이겠지만, 어쨌거나 글로 느껴지는 그의 속도, 삶을 대하는 방식, 자신을 표현하는 기술, 타인을 대하는 태도, 그런 것들이 다 너무 좋았다. 그의 책은 다 읽어야지, 마음먹을 정도로. (일단 도서관에서 몽땅 빌렸다. 산 책도 있고..)
5.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 사람은 나랑 다르다' 하는 생각이었다. 이전 글에도 썼지만, 책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때로는 '책을 읽는 사람, 글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 어느 정도는 비슷한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를 많이 발견한다. (물론 '내가 읽는 책'의 종류, 장르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런데... 김보통은, '와, 이 사람 뭐지? 정말 이렇게 살았다고?' 계속 물었다. 아버지의 한 마디("너는 머리가 커서 권투는 못하겠다")에 그 길로 체육관에 등록해, 제대로 권투를 한 것(동메달을 땄다. 따긴 땄는데...), 글도 모르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초등학교 1학년 내내 격리석에 앉은 것(그러다 심부름을 하게 되는데...), 고등학교 때는 밤새 딴짓 하다 동틀 때 학교에 가서 혼자 평행봉을 하고는 수업 시간 내내 잔 것(그러다 어쩐 일로 깨어 있던 날이 있었는데...), 무계획으로 여행을 다니는데 아예 수영복 바지에 반팔만 걸치고 몇 개 되지 않는 소지품은 비닐봉지에 넣어 다닌 것(그러다 모르는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 집에 머물기도 하는데...) 등등.
재능의 면에서 이 사람이 가진 것과 못 가진 것, 학창 시절의 삶, 어른이 되어 선택한 것과 즐긴 것이 너무너무 달랐다. 어떤 무대 공연을 본 것처럼, 입을 벌린 채 눈을 껌뻑이며 감탄이랄까, 그런 상태였다.
6.
하지만 이질감, 그로 인한 신선한 충격에서 그치지 않은 것은, (위에 쓴 '정서'와 연관이 있을 텐데,) 이 사람에게 묻어 있는 '서글픔'이 낯설지 않아서다.
김보통은, 내가 느끼기에, 자기의 힘든 시간을 '말없이' 견뎌왔던 사람 같다. 그것을 한 번도 제대로 빵! 터뜨린 적 없는 사람. 그러고는 언젠가부터 느리게, 차근차근, 뾰족하지 않고 부담스럽지 않게 뽑아내고 있다. '작은 외삼촌'이 해줬던 칭찬을 품고 책 한 권 읽지 않는 작은 외삼촌 같은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했는데, 정말 술술 읽히는 글을 쓴다. 그러면서 재미도 있고 철학도 있는 글을 쓰는 게 엄청난 노력이 드는 일일 텐데, 티가 안 난다. 발은 엄청 빨리 움직이면서 보기에 우아한 백조...는 아니고, 일 진짜 많이 하는데 느긋하고 소탈해 보이는 소 같다. 어깨에 힘도 들어가지 않았고 목도 빳빳하지 않다. 콧대도 턱도 치켜올리지 않는다. 자기 삶의 별별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 과시도 자기 연민도 없고, 위악도 위선도 없다.
그리고 (이런 말은 섣부르게 쓰고 싶지 않은데, 또 함부로 평가할 수도 없을 텐데,) 김보통은 '좋은 사람' 같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그게 누구든, 어떤 처지에 있든),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 하고(타인도 '나'만큼 중요하니까), 홀대 받는 사람들, 넉넉히 누리고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라도 뭔가 하려고 한다. 누가 특별히 더 낫다는 생각에, 그래서 누구는 더 많이 가지는 게 당연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움츠리고 당하고 참고 살아야 하는 현실에 분노하는 것 같다. 자신의 자리에서 뭔가 하려 하지만, 디폴트 값은 불완전과 부조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의 서글픔, 나는 그런 게 느껴졌다.
7.
그러한 것이라면 내 안에도 있는데.
그런데 그처럼 재미나게, 웃기게, 술술 읽히게 글로 쓰지는 못한다. 아니, '아직 멀었다'고 하자.
그래서 그의 글을, 읽고 읽고 또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