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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Oct 25. 2023

<나는 솔로>와 브런치
: 그리고 아무 일도 없을 뻔

나는 실패할 여유가 없어. 그러니 알려줘.

0. 

이 프로그램에 대해 익히 들었지만, 볼 생각은 없었다. 보고 싶은 적도 없었고, 언젠가 볼 것 같지도 않았다. 이유를 스스로 물어본 적은 없지만, 선정적이어서, 자극적이고 속물적이어서 그런 거 아닐까? 하지만, 땡. 아니었다. 보자마자 깨달았다. 내 일이 아니어서 그랬다.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 내신성적이나 수능점수, 사춘기 고민, 교복 뭐 그런 것들에 대한 관심이 빛의 속도로 사라지듯이, 아이를 더 낳지 않기로 결정하는 순간, 산후조리원이나 육아템들이 검색어에서 말끔히 지워지듯이, 짝을 찾는 프로라니. 그것을 공개적으로 하는 시스템이라니. 내 인생에는 가능성 0에 수렴하는 옵션이다. 어떤 사람들이 나와서, 어떻게 플러팅을 하고, 어떻게 맺어지는지 관심 가져서 뭐하나? 내가 이토록 실용적인 인간이었나 싶지만, 어쨌거나 일부러 거를 필요도 없이 관심 밖 존재였다.




1.

그런데 어느 평론가 말에 혹했다. 요즘엔 대중적으로 무슨 말을 하려면 <나는 솔로(16기)>를 봐야 한다고, 그게 젤 재밌으며, 이전과 다른 차원에 들어섰다고. 무슨 말인고 하니, 이전엔 누구 하나 바보나 빌런을 만들어 욕하는 프로였다면, 이젠 '나도 저러지 않나' 시청자들이 돌아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덧붙여, 10분만 보라고, 그럼 다 보게 될 거라는 장담까지.


그래? 그렇다면 (마침 완결도 되었겠다,) 일단 1화를 보겠어.




2.

너무 재밌는 것이었다. 세상에. 3일 동안 90분짜리 총 11화를 다 봤다. 새벽 3시에 그날 장장 다섯 시간 운전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잠을 잔 건지 꿈을 꾼 건지 모를 정도로 눈앞에 선했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애들 장난이구나, 생각했다. 진정한 '드라마'였다.


열두 명의 확실한 캐릭터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중대한 욕망을 가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피를 튀기며 갈등을 벌이고 있었다. 현실이었고, 어떻게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어떻게 끝나야 한다는 그림도, 목표도 없다. 게다가 이걸 전지적 시점으로 보고 있자니, 묘한 전능감에 길티 플레저가 스멀거리다 활활 타올랐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3.

실망은, 끝나고 나서 덮쳤다. 보는 동안 이 인기 많은 프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출연자들의 현재 상황(촬영과 방영 사이의 시차가 있으니)이 너무 궁금했는데, 꾹 참고 프로에만 집중했다. 마지막 회를 다 보자마자 유튜브와 포탈을 뒤졌다. 이틀 더 현망진창 가자. 제대로 취하고 빠져나오자꾸나.


그리고 깨달았다. 아, 우리가 드라마를 보는 이유가, 소설을 읽는 이유가 있었지... 현실은 매끈하지 않다. 의미 있는 일과 무의미한 일, 재미있는 일과 지루한 일이 뒤섞여 있다. 무엇보다, 완결이 아니다.


재미가 있든 없든, 등장인물이 사랑스럽든 그렇지 않든, 해피엔딩이고 새드엔딩이고 간에, 우리는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소비한다. 마음을 주기도 하고, 욕하기도 하고, 삶에 대해 배우기도 하고... 그 후에 내 삶을 산다. 휘발되어 버리거나 어딘가에 간직하거나 하면서. 하지만 <나는 솔로>는 그렇게 소비할 수 없는 이야기이고, 등장인물이다.


많은 말들이 오갔고, 사건들이 있었다. 출연자들끼리도 그랬고, 출연자와 시청자들 쌍방향으로도 그랬다. 시청자들끼리도 그랬다. 기가 막힐 일이, 미워할 일이, 욕할 일이 넘쳤다. (돌아보는 일은 그다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을 완전히 모르니까(방영본조차도 편집한 내용인데, 이후는 오죽하랴)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게 이 프로그램에서 제일 명시적으로 보여준 교훈 아닌가. 그럼에도 정말 상식을 벗어났다 싶은, 욕해도 마땅하다 싶은 점이 있었다. 하지만 내 일상이 카메라로 찍힌다면 나라고 다를 것 같지 않았다. 이렇게 정신을 차렸다가도, 그래도 쟨 진짜 이상하지 않아? 저건 심하지 않아? 하는 말들이 비어져 나왔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들의 삶을 잘 알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럴 이유도 없는데...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하든, 그냥 자기 삶을 사는 동시대인일 뿐인데, 내가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제대로 현타가 왔다. 하지만에 하지만... 인지부조화... 알면 알수록 찝찝하고, 생각할수록 지긋지긋했다.  




4.

이렇게 푹 담그고 빠져나왔다. 배우고 느낀 바가 없진 않으나, 굳이 또 보진 않겠다 싶었다. 그렇게 혼자서 <나는 솔로>를 완결지었다. 끝. 이제 안녕. 각자 자기 삶을 삽시다.


그런데 <나는 솔로>와 별개로, 그러니까 실제 이야기나 그들의 관계와 별개로, 한 장면이 하나의 텍스트로 쑤욱, 거짓말같이 쑤욱, 자꾸 떠오르는 것이다.


상철이 영숙과 영자 사이에서 하던 고민, 자꾸 되뇌던 말, "둘 중 하나라도 내게 확실한 사인을 주면 나도 맘 편히 그리로 갈 텐데." 이에 대한 정숙의 촌철살인, "나는 확실히 너야, 라고 해도 마음을 정하기 어려운데, 어느 미친 여자가 네가 마음을 정하면 나도 마음을 정할게, 하는 남자에게 가?"


상철의 마음이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숙의 말은 시원하다는 표현이 아까울 정도로 맞는 말이었다.




5.

나는 상철과 같은 82년생. 아이 셋을 낳고 기른 12년 동안 경력 단절.


나도 왕년의 시절이 있었다. 꿈 많던 때, 뭐든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뭐든 될 수 있을 것 같은 때가. 실제로 잘하기도 하고, 선망을 받던 순간도.


하지만 냉정하게 지금 나는, 거의 제로베이스. 그렇다고 이대로 "아이를 낳은 게 내가 인생에서 한 일 중 제일 잘한 일입니다" 하고, (결론적으로 그렇게 된다 해도) 달라지는 거라곤 나이뿐인 삶을 살고 싶진 않다.


그러니 뭐라도 해야 한다는, 뭐라도 되어야 한다는 갈망이, 이미 늦은 데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상황 판단과 합세해 조바심을 만들어낸다. 난 실패할 여유가 없어. 그러니, 어떤 일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인지 제발 알려줘. 그럼 나도 그리로 갈게. 그 일을 열심히 할게.




6.

나는 내가 글을 써야만 하는 사람인 걸 안다. 최악일 때 글을 쓰면 좀 나아지고, 혼란스러울 때 글을 쓰면 정리가 된다. 충만할 때도 글로 제일 잘 표현할 수 있다. 사소하고도 확실한 행복을 주는 행위가 글쓰기이고, 마약을 하면 이런 기분이려나? 할 정도의 극강의 희열을 맛본 것도 소설이나 대본을 쓰고 나서다.


글쓰기가 업이 되면 좋겠다, 하고 조용히 바랐다. 그래서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런데 그런 쪽으로 길이 열리지 않았다.


의기소침해져서, 또 조용히 내려놓았다. 업이 아니면 어때, 그냥 나를 위해 쓰고 살면 되지. 그래, 그럼 되지. 그리고 신맛을 다신다. 글쓰기를 그렇게까지 좋아한 건 아닐지 몰라. 나는 다른 재능도 있잖아. 뭔가 다른 일을 찾아보자. 되는 일을 하자. 될 만한 일을 찾아본다.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고, 그동안 쓴 글을 묶어 브런치북을 만든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다.




7.

나는 팔랑귀가 아니다. 남의 의견을 꽤나 잘 무시한다. 칭찬이나 인정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대놓고 '경각심'을 갖는 사람이다. 그런 줄 알았다. 외부의 사인보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고. 하지만, 땡. 나는 먼지같이 가벼웠다. 하루에도 몇 번씩 브런치 '통계'를 확인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걸 보니... 역시 이 길은 아닌가, 마음을 애써 접으려다 깨달았다.


내가 결국 원하는 것이, 상철이 '그게 누구든 전업주부가 될 아내와 미국에서 행복하게 사는 상태'인 것처럼 '그게 어떤 일이든 열정을 다해 일하고 어느 정도 인정받고 만족하며 사는 상태'라 할지라도, '바로 이 일을 하고 싶어. 내가 원하는 건 바로 이 일이야. 그러니 되든 안 되든 일단 끝까지 해볼 거야'가 먼저 와야 한다. 상철이 마음이 가는 사람을 스스로에게 묻고, 상대에게 거절당하든 말든 '당신이 좋습니다.' 고백하고 직진하는 게 먼저인 것처럼.


왜 나는 그가 취해서 주사 부리듯, 질리는 집요함으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며 묻기만 하는 것을 어리석다 생각했으면서,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을까. 신의 뜻이든 세상사 이치든 혹은 우주의 기운이든, 어느 미친 존재(무언가)가 직진은커녕 갈팡질팡조차 안 하고 머뭇거리기만 하는 인간에게 길을 열어줄까.


"직진하면 길을 열어주나요?"라고 묻지 않겠다. 다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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