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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Dec 16. 2024

올해의 빌런, 윤석열

우리 안의, 내 안의 어떤 모습의 극단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에 바스가 없으리란 법은 없다. 높은 바위산을 차지하고 산 구석구석을 속속들이 노려보며 이익만을 위해 사회를 망가뜨리는 멧돼지 같은 자들.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미치기를 바라고, 그래서 이익이 돌아오는 것을 즐기면서 자기만 정상이라고 아는 자들. 그들보다 미친 바스가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바스는 우리의 현실에서 진짜 미친 자들이 누구인지 생각해보게 해주는 캐릭터다.

ㅡ최무진, <스토리 창작자를 위한 빌런 작법서>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부터 대통령 탄핵 가결까지 대략 2주일의 나날 동안, 나 역시 불안하고 혼란했다. 인물과 사건, 입장과 갈등, 복선과 반전이 마구 튀어나와 부딪혔고, 돌아가는 판을 읽고 해야 할 바를 알기 위해 쏟아지는 정보를 허겁지겁 삼켰다. 그것은 한국인으로서, 여지없는 당사자로서 당연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 내 안의 어떤 자아는 이것을 '이야기', 그러니까 '몰입도 최강의 역동적인 거대한 이야기'로 경험하고 있었다.


개인에게 사회의 어떤 사건은 그 영향이 구성원의 수만큼 나뉘지만, 어떤 사건은 그만큼 증폭된다. 82년생인 내가 경험한 후자의 예는, 1997년 IMF와 2002년 월드컵, 2016년 박근혜 탄핵, 2020년 코로나 등이다. (2009년 노무현 서거, 2014년 세월호, 2022년 이태원 참사 역시 앞의 사건만큼 국가적인 사건이지만, 애써 당사자이기를 거부한 반쯤의 사람들 때문에 '모두의 일'은 아니게 되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이야기가 그다음이 될 것이다.


일촉즉발의 순간을 실시간으로 목도했고, 느슨하게 엮인 구성원들이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그토록 많이 모여 그토록 단단하게 뭉쳤으며, 충격과 분노, 공포와 환희, 허탈과 열망, 무력감과 성취감, 소속감과 연대의식까지 한꺼번에 강렬하게 맛보았다.


이 일의 시작을 만든 자를, 결말을 갈망하게 하는 자를 나는 잠깐 떠올리기도 싫고, 내 생에 어떠한 자리도 내어주고 싶지 않지만, 그를 인정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그가 이 이야기에서, 그리고 이 이야기를 통해 해낸 일은 실로 대단하니까.


2030세대가 정치적으로 각성했고(혹은 이번 기회에 제대로 드러냈고), 시위의 중심이 됐다. 덕분에 시위의 문화가 유쾌하고 당차게 바뀌었다. MZ세대에 대해, 그들의 개인주의적인 사고와 행동방식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워했던, 결핍과 어려움과 인내를 모른다며 조금은 못마땅해했던 그 윗 세대들과, 그들을 어른이 아니라 꼰대로 치부했던 세대가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서로에게 놀라워하고 고마워하며 함께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웬만해선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 않던 단체가 목소리를 내고, 절대로 달라질 것 같지 않던 지역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지간해선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람들이 변했다. 역시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일은 김대중도, 노무현도, 문재인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재명이나 조국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주동인물(프로타고니스트), 착한 사람, 영웅은 못하는 일이 있다.


어떤 일은 예수님이 아니라 사탄이 한다. 베드로가 아니라 가룟 유다를 보고 깨닫는 사람들이 있다. 해리 포터가 아니라 볼드모트 때문에 악에서 돌아서는 사건이 벌어진다.


강점이 곧 약점이듯이, 매력으로 느꼈던 바로 그 점 때문에 싸우게 되듯이, 우리 모두가 다 다르다는 사실은 분명히 축복이지만 필연적으로 저주가 된다. 하나같이 달라서,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 다름을 뛰어넘는, 그 모든 다름을 하나로 묶어주는 '미친 자' 때문에 한편이 되었다. 나는 이것이 통쾌하기보다 의아하다. 씁쓸하고 슬프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느낀다.


어떻게 윤석열은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렇게 강력한 빌런이 되었을까? 사탄이나 볼드모트처럼 인간 이상의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니발 렉터처럼 비상한 두뇌를 가진 것도, 아나킨처럼 출중하지도, 조커처럼 매력적인 것도 아닌데. 카이저 소제처럼 연기를 잘하지도 못하고, 안톤 시거처럼 압도적으로 무섭지도 않으며, 수양대군처럼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닌데. 섹시하지도 않고, 언변이 뛰어나지도 않은데.


지난 2년 반 동안 나는 그를 보며, 사람을 끌어들이고 홀리게 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부모 덕에 가진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걷어내고, 검사라는 직업으로 휘두를 수 있었던 권력을 빼면, 그에게 남는 것은 없다고. 대통령이라는 최고 권력자가 되었지만, 무능과 무지를 만천하에 들켰을 뿐이라고.


그런데 지난 2주일 동안 나날이 깨달았다. 그는 상식을 벗어난 사람이고, 줄기차고 맹렬하게 상식을 벗어나면 따르는 사람이 생기기도 한다는 것을. 더 지치지 않고 줄기차게, 약해지는 기색 없이 맹렬하게, 상식적인 사람이 멈칫할 정도로 상식을 벗어날수록, 지지도 격렬해지고 그만큼 그도 강력해진다는 것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드는 사이비 교주에게서 보는 일과 비슷했다.


완전한 선인도, 완전한 악인도 없다. 한 인간 안에 선과 악이 동시에 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좀 더 선할 때가 있고 좀 더 악할 때가 있다. 이 상식을 품고 보통의 사람들이 섣불리 누군가를 매도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열어두고 주저하는 사이에, 어떤 사람들은 거침없이 악으로 선택하고 달려나가는 것을 본다. 사람도 아닌, 혹은 아주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 안의, 내 안의 어떤 모습의 극단을 본다.


좀처럼 볼 수 없는, 비정상의 선택과 결정과 언행을 하는 자가 현실의 우리들을 돌아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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