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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압수수색>: 압도당하는 순간에

나를 위해서라도 이기는 역사를 봐야겠다.

by 모도 헤도헨

영화적으로 재미있다는 후기들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보지 않았을 것이다. <압수수색> 책이 나왔을 때도, 뉴스타파 후원회원으로서 의리로 살까도 했으나 넘겼다. 검찰이 자신들의 권한을 비열하게 휘두르고 멋잇감이 된 상대가 처참하게 당하며 다치는 모습을, 그 결과가 뻔한 싸움을 주의해서까지 보고 싶지 않았다. 현실로 충분했고, 영화로라면 <그대가 조국>으로 족했다.


그러니까 인간의 악함과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 내가 더 알아야 하나? 더구나 지금? 그건 정신건강에 너무 해로웠다. 방어적인 태도였달까. 그런데 이 영화를 택할 만한 사람들이 재미있게 봤다면, 울분에 끓거나 공감하다 괴로워지거나 의협심에 떨쳐 일어나게 되는 것 말고 다른 게 있나 보다, 그런 기대가 생겼고 궁금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판단과 기대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나는 이 영화에서 내가 기대했던 무언가를 보았지만, 그게 현실에, 그리고 <그대가 조국>에는 없었던 것이었느냐 하면, 아니니까. 부당한 공격에 넘어지면서도 고개를 드는 모습, 피를 흘리고 벼랑 끝으로 내몰린 상태에서도 끝내 비굴해지지 않는 모습, 비참한 상황에서 비탄에 빠지는 대신 형형한 눈빛을 내는 모습 등.


하지만 그런 것들을 발견하며 나도 함께 웅크리는 대신 고개를 쳐들고, 가슴을 치는 대신 가슴을 펴고, 우는 대신 눈을 이글대며 볼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전과 달리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것은, 끝이 없는, 혹은 끝이 뻔한 싸움인 줄 알았는데, 끝이 보이는 것, 해볼 만한 싸움이 된 것, 그래서가 아닐까?


그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지만, 조금 슬프기도 하다. 결국 내가 질려버렸던 것은 인간의 악함보다는 연약함 쪽이었나 보다.





영화는 줄곧 뉴스타파 기자들과 대표가 압수수색과 정치 공세, 행정적 규제 등으로 검찰을 비롯한 정치권과 행정부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확실히 궁지에 몰린다. 한편 현실에 걸친 인식으로 이들이 아직 끝장나지 않았으며 다행히 돌파구가 열렸다는 것을 아는데도, 생생한 현장에 같이 압도당하고 만다.

그런 순간에 한상진 기자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닦으면서 '이 싸움은 내가 반드시 이기겠다'고 말한다. 봉지욱 기자는 국회에서 증언할 때를 떠올리며 (국민의힘 의원이 하도 어이없는 질문을 해서) 얼굴도 상기되고 말도 빨라졌다며 흥분했다는 걸 인정하며 웃는다. 김용진 대표는 검찰청 포토라인 앞에서나 조사를 받으러 가는 길에 날씨 이야기를 한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 눈동자로.


그들이 가족의 안위를 생각할 때, 사방에서 공격을 받을 때, 막상 압수수색을 받을 때 떨었다는 것을, 떨까 봐 떨었다는 것까지 영화는 보여주었다. 그야말로 바위 앞의 계란처럼 보였는데, 나는 왜 그들의 보잘것없는 용기와 여유가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다. 특히 마지막에 그들 셋이 뚜벅뚜벅 걸어가는데,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그래, 우리는 함께여서, 그리고 (김용진 대표의 비유대로) 아무리 캄캄해도 언젠가 밝아지고 말 테니까 괜찮은 거라고 다독이며 영화관을 나왔다. 실제로 터널 끝이 보이니까 정말로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날 이어서 영화 한 편을 더 보았다. 뒷자리에 앉은 사람이 의자를 자꾸만 발로 찼다. 거슬리긴 했지만 이상하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조심해달라고 건조하게 요구하는 것도 관뒀다.


그날 저녁엔 고깃집에 갔다. 바로 뒷자리에 앉은 가족이 아이에게 틀어준 스마트폰 소리가 무지막지하게 컸다. (시끄러운 곳이었으니 볼륨을 높인 것일 텐데) 불편한 상황이었고, 직접 말하든 직원을 통해서든 상황을 바꿔볼 수 있었겠으나 역시 관뒀다. 그냥 조금 참고 넘어가고 싶었다.


내가 갑자기 관용을 베풀기로 한 것은, 용기가 바닥났기 때문이었다. <압수수색> 영화 때문에 나는 그때까지 떨고 있었다. 권력과 악의 부조리가 생생해서, 나 역시 하잘것없는 사냥감이 된 것 같아서 영화가 끝났는데도 헤어나오질 못했다. 현실의 검찰이 무서웠다기보다, 힘을 가진 무언가 앞에서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무력한가에 대해 계속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니... 사실 내가 검사였다면, 검사라는 갑옷을 든든하게 여기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다.


갑옷도 없고 용기도 없는 나는, 내가 앉은 의자를 악의 없이 발로 차는 관람객이나 어른처럼 앉아서 식사하지 못하는 아이를 위해 스마트폰의 도움을 받는 부모와 싸워선 안 됐다. 진짜 악에 맞서려면, 압도되는 순간에 떨면서도 떨지 않으려면, 흥분되는데도 이성을 놓지 않으려면, 당장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위나 저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으려면, 사소한 용기도 섣부르게 쓰면 안 되며 넓게 연대해야 하니까.


세상이 좋아져서 겁 많은 자의 애처로운 용기는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아니, 간접경험으로 마음이 이렇게나 쪼그라들다니. 나를 위해서라도 이기는 역사를 봐야겠다. 더 응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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