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표 한 장 주세요.”
“목적지는요?”
“상관없어요. 지금 당장 출발할 수 있는 표 한 장이요.”
“타이난행 일반열차가 10분 뒤에 출발해요. 고속열차가 아니라서 4시간 정도 걸려요. 괜찮아요?”
“네 좋아요. 감사해요.”
작년 11월 마지막 주 월요일, 저녁 비행기를 타고 대만 타이중으로 떠났다. 여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떠난 도망길에 가까웠다. 도망지로 정한 곳이기에 그 도시에 대한 정보 한 줄 찾아보지 않았다. 이륙 직전 비행기에서 본 여행 블로그에는 타이중은 조용하고 한국인에게 친절한 곳이라고 쓰여 있었다.
대만 타이중은 정말 평화로운 곳이었다. 하지만 나는 또 다시 도망쳤다. 그 평화 속에서 방심하고 있으면 한국에 두고 온 생각들이 금방이라도 쫓아와 다시 내 발목을 잡아챌 것 같았다. 화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타이중 기차역에 가 가장 빠른 기차표를 달라고 했다. 매표소 직원의 발권과 동시에 그날 나의 목적지는 타이난으로 정해졌다. 타이난에 대해 아는 것은 남쪽에 있는 큰 도시라는 것, 그것뿐이었다. 예상소요시간인 4시간에서 30분이 더 걸려 타이난에 도착했다. 그제야 나는 구글 맵을 켜고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안평수옥이라는 곳이 있네. 여기를 가보자.’
타이난에서의 목적지도 고민 없이 정해졌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오늘 아침에 정해진 목적지였으니 교통에 대한 정보가 있을 리가 없었다. 구글 맵에는 48분 뒤에 버스가 온다고 떠 있었다. 수도인 타이베이를 제외한 대만의 다른 도시들은 교통이 좋지 않아 버스 배차간격이 짧게는 20분에서 1시간까지 걸린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갑작스러운 40여 분의 자유시간, 나는 정류장 근처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눈앞에 사당이 하나 나타났다. 평소였다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관음전’이라 적혀있는 것을 보곤 마음이 동해 그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관세음(觀世音)보살, 세상(世)의 소리(音)를 본다(觀)는 보살이다. 고난에 처한 중생의 소리를 듣고 그에 응답하여 원하는 바를 들어준다는 보살. 버스 시간을 때울 겸 찾아간 법당은 생각보다 천장이 높았고 천장 가득 금빚 장식물들이 있었다. 관광지가 아닌 대만의 법당에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라 들어가기를 망설였다. 마침, 입구에 가까운 제단을 정리하고 있던 한 할머니가 서성이는 나를 발견하곤 말을 걸었다.
“너 외국인이니? 일본? 아니면 한국?”
“한국인이에요. 혹시 들어가도 되나요?”
“당연하지. 들고 있는 밀크티만 밖에 잠깐 둬.”
낯선 탱화, 낯선 불상들이 보였다. 제단에 향 몇 개만 피우는 한국과 달리 대만은 법당 한 가운데 커다란 화로를 두고 향을 한가득 피워내 향 연기가 자욱했다. 법당 안은 우유 몇 방울을 떨어트린 물속에 있는 공간 같았다. 절을 하는 방법도 한국과 달라 법당 안 사람들이 절하는 법과 향을 올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배운 대로 절을 하고 향을 올린 뒤 눈을 꼭 감고 있는 기도의 시간, 남들은 내가 관세음보살에게 경의를 표하는 줄 알았겠지만, 나는 그 시간 관세음보살을 원망했다.
‘관세음보살님. 왜 제게는 자비를 보이지 않으시나요? 중생의 고통을 보고 듣는다는 보살님이 왜 제 고통과 어려움은 보지 못하시나요? 왜 저는 늘 이런 번민 속에서 살아야 하나요? 저는 구제하지 않으시나요. 왜.’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여기서 눈물을 흘리면 내가 지는 것 같아서. 슬픔보단 억울함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짧은 기도가 끝나고 뒤를 돌아보자 아까 그 할머니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그리곤 나에게 대화를 시도했는데,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만 남방 사투리가 담뿍 묻어나는 할머니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자, 할머니는 불상 뒤편에서 종이와 펜을 가지고 오셨다. 그리고 우리의 기묘한 필담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는 종이 위에 일필휘지로 한자를 쓰고, 나는 아이폰 노트를 켜 글자 크기를 최대로 한 뒤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여기에 왔어?”
“안평수옥에 가려다 지나가는 길에 법당을 봤어요. 저도 불교거든요.”
“외국인이 여기 온 건 처음이야. 너무 신기하다.”
“저도 대만에 관세음보살 법당이 따로 있는 건 처음 봤어요. 너무 평화롭고 좋네요.”
“대만은 여행으로 온 거야? 혼자?”
“네 혼자 여행 왔어요.”
“진짜 대단하다. 나는 대만 밖을 나가 본 적이 없어. 너는 새 같은 사람이네.”
그 이후로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었지만, 저 ‘새’라는 말을 듣고 나선 온 신경이 그 단어에만 곤두서 있었다. 어느새 버스 시간이 다 되어 이제 가봐야겠다고 말하자. 할머니는 갑자기 불단 위에 있는 물건들을 주섬주섬 모으더니 나에게 가지고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내가 놀라 거절하자 할머니는 종이에 ‘무료’라는 글자를 대문짝만하게 쓰셨다.
“아뇨, 아뇨 괜찮아요. 불단에 바친 것을 제가 가져갈 순 없어요.”
할머니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종이에 글자를 쓰셨다. 종이에 쓰인 글자는 딱 두 글자였다.
그 두 글자를 보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할머니는 차근차근 그 물건들을 모아 봉투에 담아 주셨다. 그분은 이미 알고 계셨으리라. 외국인 여자가 혼자 여행을 와 법당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지고 있는 번뇌의 무게를 짐작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나에게 글로 뜻을 전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작년 11월의 나는 원하던 것을 하나도 이루지 못한 게 서러워 잠조차도 이루지 못했다. 밤이면 귓전을 울리는 심장 소리가 온몸을 짓눌렀다. 살아있다는 것이 버거웠다. 하지만 할머니의 그 한마디로 언제든 날아갈 수 있는 새가 되었다. 가진 게 없어서 서글프던 삶이 순식간에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는 삶이 되었다. 새는 날기 위해 뼛속이 비어 있다고 한다. 마치 빨대처럼. 새는 뼈조차도 가득 채우지 않는다. 그동안 나를 날지 못하게 한 것은 뼛속까지 가득 채우려 분투하던 나 자신이었다. 이제 채움이 아닌 비움을 위해 살아가는 삶 속에 있는 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다. 그저 나의 깃을 펼쳐 모든 게 깃 사이로 지나가도록 하면 날아갈 수 있으니까.
P.S. 관세음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다양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난다고 한다. 이를 응신이라고 하는데, 때론 노인처럼 일반 사람의 모습으로도 바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