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본다.’는 것을 ‘영화라는 영상을 본다.’는 의미로 쓴다면
굳이 품을 들여 영화관에 가지 않아도 영화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단순히 영상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관이 있는 건물을 향하며 현실과 헤어질 준비를 한다.
영화관이 있는 건물에 들어와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북적이던 대로변을 벗어나 현실과 한 걸음 멀어지고, 영화관 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그 사이로 훅 밀려드는 달콤한 캐러멜 팝콘 냄새를 맡으며 또 한 걸음 더 현실과 멀어진다. 마지막으로 상영관 앞에 도착해 짧고 어두운 복도를 꺾어 들어가면 마침내 현실과 두 시간 남짓한 이별을 할 수 있다.
내 자리를 찾으며 먼저 들어와 있는 관객들을 슬쩍 둘러보는 것도 중요하다. 둘의 사랑에 방해가 된다는 듯 좌석 사이의 팔걸이를 올리고 꼭 붙어 있는 연인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누구보다 이 영화에 진심인 것 같은 사람, 영화보다는 팝콘을 먹으러 온 것 같은 사람 등등. 이름도 성도 모르고 때로는 뒷모습만 내내 보게 되는 사람들과 한 시간과 장소에서 같은 것을 보고 그 순간에 빠져드는 경험은 아주 귀하다.
같은 시간, 같은 영화를 택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제 이 상영관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한배를 탄 동지가 된다.
영화관의 장점이자 단점은 시작된 영화를 중간에 끌 수 없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영화를 집중하며 볼 수 있지만 운 없이 끔찍한 영화를 골랐을 땐 꼼짝없이 티켓값과 시간을 함께 날려버리는 선택을 하게 된다.
내가 그렇게 매몰 비용의 오류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 앞자리 사람들의 뒤통수도 나만큼이나 갸웃거리며 고뇌하는 것을 발견하면 ‘역시 나만 그런 게 아니군.’ 하며 위안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영화의 상영이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드디어 탈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면 그 안의 다른 관객들도 미어캣처럼 동시에 고개를 든다. 그러면 우리가 이 고난을 함께 견뎌냈다는 애틋한 감정과 함께 이게 뭐라고 풋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보러 구태여 영화관에 간다. 그리고 극장보다는 영화관이라는 단어가 더 좋다.
한 번에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사용되는 장소라는 게 더 잘 드러나는 단어라서 좋다.
한 순간에 하나에만 집중하는 행위 자체가 귀하고 소중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나 역시 한 순간에 하나에만 집중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여간 쉽지가 않다.
옛 조상들도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건 어렵다고 말해왔는데, 나는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정도가 아니라 여기저기 줄을 매달고 있는 꼭두각시가 된 것 같다.
그렇게 매여 있는 여러 가지 줄을 잠시 벗어두기 위해 나는 영화관에 간다.
한 번에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연습을 할 겸.
그리고 또 새로운 동지들을 만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