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을 좋아해?
“아 그거 공차 타로밀크티야?”
“응, 왜?”
대학교 3학년, 공강시간을 때우려고 들어간 학회실에서 우연히 만난 동기와의 대화였다.
‘쟤는 인사도 안 하고 사람보다 밀크티를 먼저 봐? 웃겨.’
“하… 나는 공차 타로밀크티를 보면 전여자친구가 생각나…”
처음엔 언짢았지만 이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동기를 살살 구슬리기 시작했다. 완급 조절을 잘해야 한다. 안 그러면 얘기를 해 주려다가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고 말 테니까.
“왜 뭔데 뭔데 전여자친구가 공차 따님이셨어?”
“걔가 날 처음으로 공차에 데려가줬어. 버블티를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데 너무 맛있는 거야. 그리고 걔는 늘 타로 밀크티 당도 30, 얼음 적게를 마셨지… 타로의 보랏빛을 보면 그녀가 생각나…”
“뭐야. 별것도 아니네 괜히 기대했네.”
“야 남의 아픈 사랑을 별것도 아니라니. 말이 심하네?”
“그럼 너는 공차 볼 때마다 그분 생각이 나?”
“그냥 문득문득. 지나다가 보면 생각나지.”
“야 그거 되게 괜찮다.”
그리고 고갤 돌려 옆에 앉아있던 당시 내 남자친구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나는 편의점을 좋아해.”
“야 너 그건 형한테 저주 거는 거 아니냐. 편의점은 반칙이지. 나갈 때마다 생각나겠어.”
“그럼 좋은 거 아니야? 안 헤어지면 되는 거지.”
“맞아 안 헤어지면 되는 거지.”
내 말에 빙긋이 웃으며 맞장구 쳐주던 그와 지금은 당연히 헤어진 상태다.
나를 잊지 말라고 편의점을 좋아한다고 했던 건 나였는데. 그는 기억도 못 할 말에 내가 얽매여 편의점을 볼 때 종종 생각이 난다. 저주에 걸린 건 그가 아니라 나였다. 그렇다고 그 애가 그립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 시간이 그립긴 하다. 그때를 생각하며 나 역시 그 애처럼 빙긋이 웃는다.
나보다 두 살이 많았던 그는 수줍음이 많았고, 늘 말없이 웃었다. 내가 대학교 2학년이 되던 무렵 그가 군대를 제대하고 학교에 복학했다. 당시 부학회장을 억지로 떠맡게 된 나는 복학생 선배들을 잘 챙겨주라는 선배들의 지침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올해 부학회장입니다. 선배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올해 복학하셨죠? 나영언니는 이번에 교환학생 가셨어요.”
“선배도 이거 들으세요? 저도 이거 듣는데.”
만나는 복학생 선배들마다 말을 걸고, 인사를 하고, 학회 행사가 있다는 걸 열심히 알렸다. 그때까진 그도 복학생 선배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4월 초의 어느 날 1층에서 2층으로 수업을 들으러 계단을 오르던 길에 우연히 마주쳐 인사를 했다. 그에게 인사를 건네면 늘 굳은 표정이었는데, 그가 그날 처음으로 나에게 활짝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순간적으로 얼굴의 긴장이 탁 풀리는 표정을 지으면서.
음료 자판기의 기계음, 로비에서 무리 지어 떠드는 사람들의 대화, 저 멀리 복도에서 여닫히는 금속 사물함의 소리, 학교 건물 대리석 위를 매끄럽게 걸어가는 발소리. 그 모든 것이 잠시 멈춘 듯 고요했다. ‘저렇게 웃을 줄도 아네.’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그와 자주 마주쳤고, 때로는 마주칠 일을 일부러 만들기도 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 도서관의 자리를 맡아 주고, 같이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4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함께 했고, 내 대학생활은 그가, 그의 대학생활은 내가 되었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크게 다툰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의기양양하게 편의점을 좋아한다는 말을 했었지 싶다. 우리는 헤어지는 그날 까지도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다. 사랑해도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는 걸 경험으로 배웠다. 헤어지는 날 우리는 마지막으로 만나 함께 밥을 먹고 카페를 갔다. 우리는 울지 않았다. 내일이라도 다시 만날 것처럼 우리는 서로 실없는 소리를 하며 함께 웃었다.
“잘 지내.”
“응 너도 잘 지내.”
안녕이라는 말 보다 잘 지내라는 말이 이렇게 무거운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고마웠어.”
“응 나도 고마웠어.”
그렇게 서로서로의 손을 잡은 채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이들처럼 서로의 말을 몇 번이나 되뇌이다 겨우 헤어질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걱정이 무색하게 나는 헤어진 그날 밤 딱 한번 울었다.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딱하고 불쌍해서.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무력해서. 오랜만에 그 애 생각을 한 건 글쓰기 과제가 있어서, 퇴근길에 CU편의점이 보여서, 날씨가 오락가락 사람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어서 그런 거겠거니. 이제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너한테 말할 수 있겠다.
나와 함께 그 시간을 보내줘서 고마웠어. 잘 지내? 난 잘 지내. 너도 잘 지냈으면 좋겠다.
난 여전히 편의점을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