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또 어떤 일로
‘좋은 하루 보내세요.’란 인사가 모든 나라에 있는 걸 보면 사람들은 모두 좋은 하루를 보내길 바라는 것 같다. 그렇다면 대체 ‘좋은 하루’는 어떻게 보내는 하루를 의미하는 걸까. ‘좋은’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좋은 하루가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는데, 좋다는 건 나쁘지만 않으면 되는 건가. 아니면 어느 수준 이상이 되어야만 비로소 좋은 걸까?
오랜 시간 나는 후자의 좋음을 추구하며 살았다. ‘적당히 해선 안 돼. 그건 좋은 게 아니야. 중간이나 보통 그 이상의 좋은 걸 가져야 해.’ 스스로를 그렇게 밀어붙이고 또 밀어붙였다. 남의 눈에 좋은 게 나에게 좋으리라는 보장이 없는데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모른다는 것 자체가 불안했다. 그래서 남의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얻기 위해 내 시간과 마음을 있는 대로 들이부었다. 남의 눈에 좋은 것들로 채워 나가다 보면 중간 이상은 하겠지. 적어도 뭔가 남는 게 있겠지. 그러다가 종종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 생기면 불쑥 불안이 고갤 들었다.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나는 늘 무언가를 해야 했다. 마침내 남에게서 ‘부럽다. 좋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여전히 ‘이게 좋은 건가?’ 생각했다.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삶은 그럴듯해 보였다. 나 역시 그 삶에 잠시 속기도 했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거구나. 이렇게만 살면 되는 거구나. 살아가는 데 정답이 없다는 말은 정답을 찾지 못한 자들의 핑계처럼 느껴졌다. 나는 정답을 찾았는데, 바보들. 우월감에 취해보기도 했다.
맞지 않는 신발을 억지로 구겨신으면 발뒤꿈치에 물집이 잡힌다는 걸 알면서 나와 맞지 않는 삶에 나를 구겨 넣을 땐 그 생각을 못 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물집이 잡힌 것처럼 작은 바람 하나에도 소스라치게 아프고 나서야 겨우 나는 그 삶을 벗어던졌다. 누군가는 그것을 용기 있는 선택이라 말해줬지만 딱히 대단한 용기나 결단력을 가지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당장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한 행동이었다. 고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선택이라는 말도 사치였다. 한평생 정답이라 생각하던 것이 오답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또 다른 형태로 고통스러웠다. 어쩌면 내 노력이 부족해서, 능력이 모자라서 혹은 운이 없어서 버텨내지 못한 건 아닐까? 스스로를 의심했다. 능력이 없으면 끈기라도 있어야지.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한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때의 내가 물집이 다 터져 피가 나고 있는 상태라는 걸 미처 몰랐다.
한동안 하루라는 시간이 나에게 주어진 형벌 같았다. 완벽한 하루여야 겨우 좋은 하루라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완벽한 날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내 시간들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되었다. 존재와 비존재의 그 사이에서 문득 깨달았다. 나 하나 없다고 이 세상엔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갑자기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있거나 없거나 별 차이가 없다면 제멋대로 살아도 되는 것 아닌가? 처음 스스로 내린 선택은 세상에 대한 반발심의 발로였다. 과거의 나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것들을 하나둘씩 해나갔다. 밤새 넷플릭스를 보거나, 알람 없이 늦잠을 자거나, 샌드위치 하나를 사 들고 근처 공원에서 멍 때리기 등등. 그렇게 살아도 하늘은 무너지지 않았다. 세상이 나에게 무심한 것이 슬픈 일이 아니라 감사한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내 기준에서 제멋대로 살아가는 건 정말 별 것 아니었다. 애초에 타고난 성정이 적당하기도 했다.
요즘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 차곡차곡 쌓아가는 중이다. 나는 이제 곧 더워지겠다 싶은 초여름의 밤을 좋아하고, 뽀득뽀득하게 설거지하는 걸 좋아하고, 나무 아래 벤치에서 고갤 들어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빛을 보는 걸 좋아한다. 좋은 하루는 완벽해야 하는 하루가 아니라 좋아하는 것 중 하나라도 있다면 좋은 하루가 되는 거였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쌓여가면서 좋은 하루도 함께 늘어간다. 오늘은 유튜브 뮤직에서 추천한 노래가 좋아서 좋은 하루가 되었다.
내일은 또 어떤 일로 좋은 하루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