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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은낙타 Dec 17. 2021

4호선 서울역- 꿈이야기



1. 꿈을 꾸었다. 꿈이었는지, 현실인지 잘 모를 것이었다. 내가 본 땅이 눈에 선명했다. 나는 잃어버린 뭔가를 찾으러 k의 집에 갔다. k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게 왜 하필 그 사람의 집인지는 모를일이다. 꿈이 그랬다. 그 집은 k의 집이었고, 그 집에는 k와 m과 p와 y가 있었다. k는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나도 익숙한 듯 그의 환대를 자연스럽게 받았다. 나는 ‘내가 놓고온 뭔가를 찾고 있다’고 마음 속으로 말을 하였다. 내가 그렇든 그렇지 않든 k는 사실 상관 없는 것 같았다. 어떤 나라도 상관없을 것처럼 그렇게 나를 환대했다.


집은 어둡지도 밝지도 않아 적당했고 온기가 느껴졌다. 이 방 저방을 다녔는데 나는 내가 잃어버린 뭔가를 찾기보다 k의 안내에 따라 이곳 저곳을 여행하는 여행자의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아주 신기하고 충격적인 사실은 그 집의 방이었다. 방은 크지 않은 네모 모양이었고 입체였으나, 이곳이 안인지 밖인지 모를 갇혀있는 세상이 아닌 내가 존재하는 내가 서있는 세상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분명 방이었는데, 그래서, m과 p와 y가 생활하는 개인의 방이었는데, 바닥은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방에는 작게 난 길이 있었다. 그 길은 아스팔트 길이 아니라, 아주 잘 가꾸어진 정원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디선가 본 정겨운 시골길 같기도 한 길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다져진 길은 고운 흙이 다져져 있었고, 조금 투박한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보이기도 했다. 길의 옆으로는 잡초와 들꽃들이 귀엽게 피어있었다. 들꽃들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지금도 그 방의 바닥의 모습은 선명하다. ‘이런 방은 처음이야’ ‘이게 정말 제비꽃인가요’ 나는 놀라서 k에게 그렇게 물었던 것 같다. k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혹은 ‘그건 너를 위한 꽃인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럼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쳐다본 제비꽃과 들꽃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리고 연결된 다른 방을 갔는데, 그 전의 방에서 땅을 보고 놀랐다면, 이번 방에서는 공간 자체를 보고 놀랐다. 왜냐하면 방의 정중앙의 공간에서 대각선을 가로질러 자라고 있는 어느 식물의 줄기와 꽃을 보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설마 이런 식물이 있을까. 방에 이런 식물이 자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 차마 살아있는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k가 집의 인테리어를 위해 달아놓은 것인가했다. 가까이 다가가 만졌을 때 나는 그 식물이 살아있는 식물임을 알았고, 다시 한번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것은 어떤 초롱꽃 같은 것이었데, 방을 가로질러 공간을 가로질러 자라고 있었다. 줄기는 연해서 끊어질 것 같았는데, 실제로 만져보았을 떄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튼튼했다. 분홍과 주황과 베이지가 은은하게 섞여진 옅은 색의 꽃이 초롱꽃처럼 매달려 있어 열매 같았다. 나는 그 꽃을 보며 ‘아, 아름답다’라고 생각했다. 처음의 나는 잃어버린 뭔가를 가지러 온 것일텐데, 그냥 방을 보느라 그 곳의 아름다움과 환대에 젖어들었다.


그 공간은 식물원의 따뜻함을 가졌다. 식물원 열대지역의 습기 가득한 후덥지근한 따뜻함이 아니라, 위가 개방되어 있는 듯한 봄날의 기분. 땅은 조금 메말라 다져있는 시골 논둑 옆 풀이었다. 옅게 흙이 날릴 것 같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 그 방의 기분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했다. 잊어지지 않는 기억이 사라질까 얼른 메모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메모하지 않았어도 쉽게 잊혀질 기억이 아니었다. 최근 선명한 꿈을 종종 꾸었다. 너무 선명해서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혼란스런 것들이었다.  


2. 오늘 교사들과 긴회의를 하고 나서 뒷이야기들 속에 이 꿈이야기를 했다. 깔마의 해석도 들었는데, 그렇구나 싶은 부분도 있다. 나 나름의 해석을 거슬러 가보고 싶다.


하필 왜 k의 집이었을까 이 부분은 깔마의 해석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해석의 연결선상에서 내가 평소 가졌던 k에 대한 생각과 내가 가지고 있는 나에 대한 연민이 맞닿은 지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집은 나에 대한 연민의 집일까. 혹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집일까. 그 공간은 집이기도 했고, 바깥이기도 했다. 나는 요즘 갈등을 한다. 그 갈등은 안과 밖의 갈등이기도 하다. 그런 나의 갈등의 지점이 집이라는 방이라는 물체로 나타난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다져진 발걸음, 손길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것을 원한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그것은 자연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의 노력의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인공적인 것이 아니다. 자연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의도하거나 계획된 것이 아닌 자유의 의지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모습일 것이다. 그것은 그 공간에서 내가 느꼈던 환대가 가득한 것이겠지.


공간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식물이라는 것. 살아 있는 것. 나의 에너지와 생명의 의지가 느껴진다. 내가 모르는 잠재적인 나의 에너지가 현실에서의 나의 생각보다 튼튼한 것임을 느낀다. 종종 무기력고 설레지 않는다고 느꼈던 나에게서 그에 맞서는 에너지가 있음을 감지한다. 다른 누가 아닌 내가 나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3. 어제아래 연차 때 아주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다. 매번 타는 지하철이지만 나는 매번 새롭다. 지하철 노선도를 보는 것도 내가 가는 목적지를 찾아가는 것도 그렇다. 처음 지하철을 탔을 때 환승역은 재미있는 곳이었다. 내가 가는 곳을 위해서 접선하고, 회전하기고, 돌아가기도 하는 곳. 내려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사람들에 쓸려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내 목적지를 놓치면 안되는 곳. 내가 가는 목적지를 가기 위해서는 몇 개의 환승역은 그냥 지나치는 곳이기도 하다. 일찍 환승을 하는 때도 있고, 길게 길게 지루하게 4호선을 견디기도 한다. 집이 가장 안정적인 나는 집을 원하기도 하고 밖을 원하기도 한다. 밖인듯한 집, 나는 그중에서도 더 은밀하고 개인적인 방을 꿈꾼다. 지루함을 견디며 환승역의 유혹을 잘 지나쳐 서울역까지 왔다. 그러나 나는 목적지가 있기나 한걸까. 돌아가는 길일까. 서울역에서는 정신차리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휩쓸리기 일쑤다. 나는 ‘더 은밀하고 개인적인 방’을 가지고 싶다. 안인 듯 밖인 듯 환대로 가득한 공간을 찾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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