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시간 방과후에서 일하면서, 그것도 사람이 없어 혼자서 여러 가지 역할을 해내야 하는 상황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전체를 보며 뭐든지 해결해야만 하는 사람이었고, 게다가 빠르게 해결하고 만일을 대비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런 시간들은 참 부담스럽고, 긴장되고, 육체적인 괴로움까지 동반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당연한 일이고 마땅히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고, 나아가 내가 잘하는 일이라는 생각까지 해왔다.
최근 몇 년 나 아닌 다른 교사들의 시선을 보고 의견을 들으면서 내가 전체를 감당하지 않고 함께 있는 자리에 서 있다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에 감사했다. 그간 내가 하지 않으면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책임감은 나를 늘 긴장하게 만들었다. 단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순간에도 열심’인 내가 되었다. 그런 시간들은 나의 승모근을 굳게 만들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엉덩이와 배 근육들은 허리 근육에 까지 무리를 주었으리라. 단 몇 시간의 집중에도 뭉쳐버리는 나의 승모근은 이제 긴장의 신호등이다. 잠시 집중하는 시간에도 바로바로 알림을 준다.
우리 공간이 외부에 알려지기 전, 혹은 힘들 때는 함께 있는 보호자나구성원 외 도와주는 사람도 자원봉사를 하러 오는 사람도 흔치 않았는데 지역아동센터로 자리가 잡히고 난 최근 10여 년 전부터는 자원봉사를 하러 오거나, 실습을 오거나, 함께 일을 하게 된 새로운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렇게 방과후에는 그동안 꽤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는데, 나는 그들을 제대로 볼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제대로 보지 못했고, 그들의 말을 듣지 못했는데 그러면서도 나는 그들이 그 자리에 적격이기를 바랐다. 이미 준비되어 올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들의 말을 들을 준비도 태도도 갖추지 못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기 이전에 우리 공간을 알아봐 주길 원했고, 그런 우리 공간을 좋아하는 게 당연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빠른 시간 내에 적응하기는커녕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는 그 누군가를 보면서 실망하고 판단하며 어떻게 해서든 빨리 우리 자리와 일에 그를 맞춰 보고자 했다. 판단된 누군가가 어떻게 그 조직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을까. 뒤돌아 보면 순간순간 그 어느 때도 열심이지 않은 순간이 없었는데, 참 무서운 게 그 열심히라는 순간이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누구도 나를 비판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해야 한다는 책임감은 나를 짓누르고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압박하기도 했지만, 오만함으로 변신해 이렇게 나를 길들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깨닫는다. 내가 전체를 봐야 한다는, 미리 그림을 그리고 있어야 한다는 책임감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채찍이기도 했지만, 어느새 나를 오만함으로 무장하게 만들고, 비판할 수 없는 상대가 되도록 길들였다. 과거가 아닌 지금 이 순간도 그러하다는 사실을 문득문득 느낀다. 다만, 스스로 그런 나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안심을 한다. 더 이상 긴장하는 나를 모른 척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책임감의 폭을 좁히고 관심의 내용이 옮겨지니 일을 하며 놓치는 일도 생겼다. 그러나, 최근 나는 내가 놓친 일에 대해 (놀랍고도 아이러니하지만) 불안함이 아닌 편안함을 느꼈다. 물론, 이것은 그 순간의 상황에 대한 편안함은 아니다. 현실 상황은 더 불완전하고 위험해질지 모르지만 나의 존재를 향한 나의 시선이 오히려 편안했다는 말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함께 채워갈 수 있다는 걸 알아서일까? 그저 그냥 나를 놓은 것일까? 오만함과 책임감 사이 나는 그렇게 방황하고 방랑한다.
올 한 해는 갈지자로 걷듯 이렇게 방황하고 방랑하는 한해가 될 것 같다. 그저 허술한 영혼 하나 정처 할 곳 없을까 이리 기웃 저리 기웃대다 또 다른 호기심으로 새로운 세계를 초대하고, 초대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