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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리나 Aug 18. 2018

시대를 앞서 살아간 불운한 천재 음악가, 에릭 사티

문화예술인 열전 3

“사티의 음악을 들으면 언제나 일요일 같다. 모처럼 화창한 겨울 하루, 마당에 서 있는 나무의 긴 그림자가 오지호의 그림처럼 이편으로 건너와 처마를 거쳐 지붕에 이르는 동안의 그 시간을 묘사한 듯한 그의 음악은 그래서 혼자만의 젖어 있는 시선을 표시하고 안내한다.”

- 장석남의 <에릭 사티 - 음악의 일요일들> 중에서


언제나 천재는 시대를 앞서간다.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초에 활동한 프랑스의 음악가 에릭 사티, 우연히 TV에서 배경 음악으로 쓰인 그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당연히 현대 뉴 에이지 음악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음악이 <짐노페디>이며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작품임을 알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에릭 사티, 정식 이름은 에리크 알프레드 레슬리 사티(Éric Alfred Leslie Satie, 1866~1926). 그는 드뷔시, 라벨과 같은 동시대 거장들에게 깊은 음악적 영향을 주었고, 장 콕토, 피카소 등 당대 최고의 시인, 화가들과 어울리며 당대의 미학적 운동을 선도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젊은 작곡가 그룹인 <6인조>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되었으며, 사후에는 미국의 전위 음악가 존 케이지에 의해 현대 음악의 선구자로 존경받았다.


현대 뉴에이지 음악의 기법을 보여주는 사티의 짐노페디 1번 


그러나 사티는 뉴에이지라는 장르자체가 없던 시절, 평론가들에게 이단으로 취급되었고 인정받지도 못하고 평생을 가난과 빈곤 속에서 살다 갔다. 그나마 생전에는 젊은 음악가들의 추종도 받고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교류를 나누기도 했지만, 사후에는 이상하게도 급속히 잊혀졌다. 아무도 사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의 곡을 연주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티는 세기말의 파리에 피어난 열매 없는 꽃 같은 이단의 작곡가로 경시되고, 음악사의 한 귀퉁이로 밀려나버렸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고,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에릭 사티가 예술가로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죽은 지 38년 만이다. 묻혀 있던 그를 다시 발견한 것은 프랑스 영화감독 루이 말이었다. 1963년, 루이 말 감독은 자신의 영화 <도깨비불>의 영화음악으로 사티의 피아노곡을 사용했다. 영화가 개봉되자 사람들은 사티 음악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에 주목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OST, 광고 음악 등으로 쓰이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에릭 사티는 1866년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의 작은 바닷가 도시 옹플뢰르에서 태어났다. 사티 가족은 1872년 파리에 정착했으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사티는 가족과 떨어져 조부모가 살고 있는 옹플뢰르의 기숙학교에 맡겨지게 된다. 그러나 학교는 가족과 떨어져 있게 된 이 소년의 외로움을 달래주지 못하고 그는 점차 반항적이니 소년으로 변해 갔다. 성당의 오르가니스트인 비노로부터 받은 피아노 레슨만이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었고 그는 서서히 음악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아버지의 재혼 덕분에 파리의 가족과 합류하게 된 사티는 원하는 음악 공부를 하기 위해 파리 음악원에 입학했으나, 엄격하고 경직된 아카데미즘로 인해 몇 해 지나지 않아 학교생활에 염증을 느끼게 된다. 반발심으로 잠시 군대에 입대했으나 도저히 조직생활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한겨울에 모진 찬바람을 맞는 등 고의적으로 병을 일으켜 의가사 제대를 한다. 제대 후 세기말 파리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본격적인 음악가의 생활이 시작된다.

사티는 몽마르트의 카바레 ‘흑묘’에서 피아니스트로 일하면서 헝클어진 머리에 중절모와 안경을 쓰고, 수염을 기른 채 몽마르트를 휘젓고 돌아다니며 폭음을 했고 엉뚱하고 기발한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바로 이 시절 그는 오늘날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피아노곡들인 <오지브>, <사라방드>, <짐노페디>, <그노시엔> 등을 작곡하면서 서서히 그 독창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에릭 사티는 기존 음악계가 쌓아놓은 신조나 미학을 무시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살아간 ‘세기말의 반항아’였다. 그는 낭만주의나 인상주의에 반대하여 감정의 표출을 절제 단순하면서도 기발한 음악들을 써 냈으며, 독특한 아이디어와 괴팍한 유머, 신비주의와 순수에 대한 동경을 지니고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만들어 냈다. 시대를 초월한 대담한 수법과 혁신적인 사상은 미래파의 출현을 예고했고, 초현실주의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드뷔시는 사티보다 네 살 위였고 이미 유명한 음악가였지만 사티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담은 피아노곡 <Je te veux(나는 당신을 원해)>


그러나 에릭 사티를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 것은 가난과 외로움이었다. 평생 자신을 ‘무슈 르 포브르(Monsieur le Pauvre)’ 즉, ‘가난뱅이 씨’라고 자칭할 만큼 가난했으며 단 한 번의 연애를 끝으로 독신으로 살았다. 짧지만 격렬하게 사랑했고, 헤어진 뒤에도 평생 그의 마음에 자리했던 사티의 처음이자 마지막 연인 쉬잔 발라동은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와 르누아르, 그리고 드가의 모델이자 연인이며 화가이기도 했다.

실제로 사티 생전에 그의 집을 들어가 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스스로 상아탑이라고 이름 붙인 파리 교외 어느 낡은 건물의 3층에서, 그 누구의 방문도 허용하지 않고 죽기 전까지 27년간을 혼자 고독하고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의 사후에 들어가 본 그의 집에는 구석구석에 쳐진 거미줄과 고장 난 피아노 뚜껑 밑에 감춰진 쓰레기들과 잡동사니들이 가득 메웠다고 한다.


나는 이 낮고 낮은 땅에 왜 왔을까? 즐겁게 지내려고? 형벌로?

무언가 알 수 없는 임무로? 휴식 삼아? 아니면 그냥 우연히?

나는 태어나 얼마 안 된 아이일 때부터 내가 작곡한 음들을 흥얼거리고 노래 불렀지.

그래, 내 모든 불행은 거기서 시작된 거야. 

― 에릭 사티의 일기 중에서


우리는 그의 일기를 통해 그 절절한 고독과 끝없는 외로움을 읽을 수 있다. 죽은 지 백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의 음악은 드뷔시나 라벨 같은 작곡가들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그의 음악은 아는 사람들만이 발견한 숨겨진 보석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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