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더랜드>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결말 포함되어 있으니 스포일러 주의. 편견을 갖고 싶지 않아서 아무 사전정보 없이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는 컴퓨터 속의 가상세계를 상징하는 화려한 프랙탈 패턴을 한참 보여주더니 상세 설명 없이 탕웨이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초췌한 중환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얼마 후 바이리(탕웨이)에게서 영상 전화가 걸려오고 그녀의 어머니는 잠시 주저하다가 전화를 받는다. 유적지를 배경으로 고고학자의 모습을 한 영상 속 바이리는 씩씩하게 어머니와 통화를 하더니 어린 딸과 영상 통화를 하며 내내 밝은 모습을 보인다.
비행기 승무원인 정인에게 이른 아침 연인 태주의 영상전화가 걸려온다. 우주정거장에서 근무하는 태주는 다정하게 정인의 잠을 깨우며 정인의 출근 준비를 돕는다. 그러나 비행이 끝난 뒤 정인이 찾아간 병실에는 의식을 잃고 호흡기를 꽂은 아픈 태주가 누워 있다. 이어서 이용자들을 세심하게 살피며 서비스를 제공하는 '원더랜드'의 베테랑 해리와 후배 현수가 등장한다.
죽은 이와 AI를 통해 소통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 ‘원더랜드’. 수많은 이들이 서비스를 선택해 사랑하는 이와 소통하기를 원한다. 영화의 주인공 바이리는 어린 딸에게 자신의 죽음을 감추기 위해 서비스를 사용하고, 승무원 정인은 식물인간이 된 사랑하는 연인 태주의 부재를 힘겨워하며 ‘원더랜드’ 서비스를 이용해 우주정거장으로 간 태주와의 소통을 이어가며 위로를 얻는다.
죽은 딸이 계속 나타나는 것을 불편해하던 바이리의 엄마가 서비스 종료를 요청했는데, 하필 바이리의 딸 지아가 엄마를 찾아가겠다고 할머니와의 동행을 거부하며 공항에서 사라져버린 순간에 전화가 끊어진 사건이 벌어졌다. 완벽해 보이는 이 서비스에 문제가 생긴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원래대로라면 프로그램에서 바이리의 세상도 정지되어야 하지만, AI임에도 그녀의 모성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중앙처리장치에 접근하는 상상 불가능한 힘을 발휘한다.
바이리와 더불어 또 한 명의 주인공 정인도 오랫동안 식물인간으로 있던 태주가 깨어나 회복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음의 혼란을 겪는다. 머리를 다쳤던 태주는 아직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았고 종종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인다. 힘들어하던 정인은 다시 원더랜드 서비스의 태주와 접속하며 위로를 받는다. 히스테릭한 정인의 모습에 태주 또한 힘들어하던 중 정인에게 걸려온 영상전화로 AI서비스 속의 또 다른 자신과 마주하고 충격을 받는다.
태주는 정인에게 묻는다.
"왜 날 우주로 보냈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먼 곳에 네가 떨어져 있는 것 같았으니까."
결론을 말하자면 바이라와 정인의 선택은 정반대이다. 바이리는 다시 서비스가 복구되어 딸과 통화하고,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던 어머니도 손녀를 위해 서비스의 존재가 필요함을 깨닫는다. 반면에 정인은 서비스를 종료하며 현실의 연인을 받아들인다.
영화에서 무엇보다 강렬하게 다가왔던 것은 AI서비스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위대한 모성이었다. AI가 되어 서비스가 종료되었음에도 사라지지 않은 바이리가 시스템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면서 원더랜드 시스템 중앙부까지 다가오고 화면을 보는 해리에게 애원의 손짓을 보낸다. 그 모습을 본 해리는 바이리의 데이터를 삭제하지 않고 다시 네트워크에 연결할 것을 후배 현수에게 지시한다.
딸 지아와 통화를 하게 된 바이리는 힘겹게 진실을 털어놓는다.
"엄마는 죽었어."
잠시 침묵하던 지아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래도 자기 전에 동화책을 3권 읽어줄 수 있지?"
"그럼, 3권 갖고 되겠어? 6권으로 하자."
딸의 답변에 울컥한 바이리는 다음 통화를 기약하며 딸에게 인사를 건네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바이리의 모습을 지켜본다.
영화 말미의 이 장면에서 가슴이 울컥했다. 부모를 잃은 아이에게 이런 서비스가 있다면 아이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태용 감독은 부인 탕웨이 사이에 딸을 낳으면서 모성의 위대함을 실감한 것일까? 엄마 역할을 맡은 탕웨이도 어린 딸이 있기에 이 역할에 더 몰입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반면에 다시 나타난 현실의 연인을 힘들어하는 정인의 모습을 보며 미래의 인류는 완벽하게 자기가 원하는 이상형의 AI와 연애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인은 결국 서비스를 종료하고 현실의 연인을 받아들이지만 그와는 다른 선택을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다소 소름끼치는 현실이지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본다.
바이리와 정인 외에도 영화는 여러 에피소드를 보여준다. 죽은 손자와 만나고 싶어 어려운 형편에 서비스를 신청했지만 AI손자의 끝없는 요구(옷, 자동차, 장비 등등)에 돈을 벌기위해 과로하다 쓰러진 할머니, 스스로 영생하고자 원더랜드 서비스를 선택한 부유한 남자 등등. 저만의 이유로 사람들은 원더랜드 서비스를 이용하고, 해리 역시 돌아가신 부모와의 소통을 위해 서비스를 사용하지만 때로는 회의에 빠져든다.
나도 이런 서비스가 존재한다면 오래전에 돌아가신 엄마와 소통하고 싶다는 바람이 들었다. 힘들 때 전화해서 투정부리고, 위로받고 싶다. 그러나 이런 소통이 과연 옳은 것일까? 아니 AI로 재현된 내 가족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가짜인 줄 알면서도 지아처럼 그 소통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정인처럼 진짜보다 가짜를 편히 여기는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때로는 자신의 영생 욕망을 위한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가상과 현실이 뒤섞인 이상한 세상. AI가 인류 사회로 깊숙이 들어온 지금, 김태용 감독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