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꿈을 다시 되새겨 준 아동문학 시리즈
엑셀 파일 2개가 불러온 파도, 시리즈 기획의 시작
기획편집자로 살면서 6개월 동안 오롯이 기획에만 몰두했던 시간이 있다. 초등고학년에서 청소년 대상의 해외문학 시리즈 ‘레인보우 북클럽’이었다. 기획의 첫 아이디어를 낸 것은 사장님과 본부장님이었지만 초기에 합류해서 25권의 작품을 선정하고 시리즈를 론칭하고 2년 여 동안 21권의 타이틀 출간을 지휘했다. 그 회사에서 보냈던 나의 3년은 레인보우 북클럽으로 시작하고 마무리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리즈 기획을 맡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다. 2008년 2월초 내가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 내 포지션은 편집팀의 팀장이었다. 이곳은 기획을 중시해서 편집업무는 외주로 맡길 때가 많았고 편집의 중요성이 강조되지 않았다. 실제로 일하는 친구들도 출판예비학교 등에서 짧은 기간의 트레이닝만 받았을 뿐 사수에게 집중적으로 편집을 배운 경험이 부족했다. 이에 사장님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2008년 초 편집만 몇 달 동안 집중적으로 배우기를 원하는 기획자들을 8명 모아서 편집팀을 구성했다. 그 상태에서 내가 입사했고 당연히 내 역할은 그들에게 편집의 기본기를 가르치면서 지휘하는 일이었다.
기획팀과 미팅을 하면서 우선적으로 낼 리스트를 정하고 담당 편집자를 선정해서 진행하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타이틀이 많았다. 팀원이 무려 8명이나 되는데다 내가 직접 맡은 타이틀도 있었으니, 아주 어린 초짜 편집자들 외에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친구들에게는 의논 상대가 되어주는 정도밖에 일을 할 수 없었다. 날마다 야근의 연속인 나날이었다.
피로감이 누적되던 3월말, 우연히 아동 부문을 맡고 있던 이사님과 점심식사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사장님이 아동문학 시리즈를 내고 싶어하세요. 국내는 어려울 것 같아서 해외문학을 시리즈를 구상 중인데 검토를 위해 아마존에서 책을 엄청 사들였어요. 열 박스도 넘게 왔으니 300~400권은 족히 될 거에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마침 예전 회사에서 청소년 문학, 교양서 론칭 준비를 하면서 나름대로 시리즈 콘셉트 초안과 가상의 리스트를 작성한 엑셀 파일이 2개 있었다. 론칭을 백지화하면서 나도 회사를 그만두게 된 사연을 얘기하면서 파일을 드리겠노라 했다.
그런데 파일을 보낸 일주일 뒤 갑자기 우리 부서의 본부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배 팀장, 4월 1일부로 아동 부서로 이동하게 되었어요.”
“네? 갑자기 이동이라뇨?”
“3층 이 이사가 배 팀장을 전배해 달라고 사장님께 요청했고 사장님이 허락하셨어요.”
갑자기 팀장을 뺏기게 된 본부장님은 안 좋은 표정이셨고 나도 얼떨떨했다. 잠시 후 이 이사님이 나를 부르셨다.
“이렇게 준비된 기획자가 회사 안에 있는데 왜 안 쓰겠어요. 그래서 사장님께 내가 요청했지요.”
큰 고민을 덜어낸 이사님은 연신 싱글벙글 하고 계셨다.
잠시 황당하기는 했지만 전 회사에서 몇 개월 준비하다가 그만둔 상황도 아쉬웠고 3년간 해왔던 아동청소년 시장 기획을 이어서 하게 된 것도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당시는 초등학생 아이들을 키우면서 자녀교육서와 아동서에 관심이 많이 가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입사한지 2개월 만에 나는 팀원 8명이 있는 편집팀 팀장에서 팀원 없는 아동문학팀의 팀장이 되었다.
기획위원의 도움과 헌 책방 탐방을 거치며 리스트를 만들어가다
팀장이 되어 처음 한 일은 도서실에 가서 책을 살펴보고 리스트를 넘겨받는 일. 책이 너무 많아 서가에 꽂힌 것은 절반 정도이고 나머지는 박스 안에 있었다. 그나마 리스트가 있어서 아마존에서 서지 정보를 확인한 뒤 괜찮은 책은 실물을 꺼내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시리즈 셀렉션을 혼자 한단 말인가.
막막하던 차에 이사님이 기획위원 3명을 세팅해 놓았다고 하셨다. 그렇게 3명의 기획위원과 합정 어느 카페에서 처음 만나 시리즈의 방향성과 들어갈 분야에 대해 논의하는 킥오프 미팅을 마쳤다. 위원들은 일정 보수를 받는 대가로 매월 추천서 리스트를 작성해서 제출하고 그들이 추천하는 주요 도서에 대한 소개 및 리뷰를 써 주고 내가 요청하는 책의 검토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오프에서 논의하는 것은 월 1회로 잡았다.
영미권에서 공부한 경력을 지녔으며 다독가이자 특히 청소년 대상의 소설(young adult fiction) 마니아인 세 사람은 내게 영미 아동청소년 문학에 대한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영미문학이 중심이었지만 가능한 유럽의 문학을 끼워 넣고 싶었는데 다행히 미국의 아동청소년 시리즈에 프랑스, 독일문학 고전 청소년 버전이 제법 있었다. 미국 현대 성장소설 마니아인 한 분은 현대물을 추천해 주셨고 리뷰 검토를 통해 마음에 드는 책은 저작권 문의를 했다.
혼자만의 팀을 만든지 한 달쯤 지나 나를 도와줄 팀원을 한 명 채용했다. 전 회사에서 함께 청소년 시리즈 론칭을 준비하다가 론칭이 무산되고 다른 파트에서 일하던 박현주 대리였다. 추천을 받으려고 전화를 했다가 사표를 제출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다시 같이 일해보자고 했다. 그녀는 기꺼이 내 제안을 수락했고 아동문학팀에 합류했다.
우리의 서칭 방향 중 한 갈래는 우리가 자라면서 읽었던 책들을 명작들을 다시 찾아내는 일이었다. 70~80년대 아동문학은 영미권의 책을 바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만들어진 문고판이나 시리즈에서 책을 가져와 중역(영미권 도서를 일본어판을 통해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런 명작들은 원서 제목과 저자 이름조차 찾기가 쉽지 않았기에 당시 한국어판 책을 찾아서 영문 제목과 저자를 확인해야만 했다. 우리 두 사람은 어릴 때 읽은 기억을 떠올리며 인터넷을 검색해 예전 책들의 제목을 찾아냈고 헌책방 사이트와 실제 중고책방을 뒤지며 당시의 책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3~4평 남짓한 창고를 방문해 책 먼지 가득한 곳에서 1시간 동안 뒤져서 찾아낸 경우도 있었다.
사장님은 저작권 비용을 줄이기 위해 저작권이 만료된 퍼블릭 도메인을 주로 선택하라고 하셨지만 기존 아동문학 출판사들이 무수히 많이 내고 있는 뻔한 책들을 새로운 시리즈에 넣을 수는 없었다. 그런 것을 배제하다 보니 일부 책은 완성도가 너무 떨어졌고 일부는 의외로 저작권이 만료되지 않은데다 저작권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기획위원들의 도움을 받고 헌 책방을 뒤지고 회사에 있는 외서를 골라내서 50권 가량의 1차 리스트를 완성했다.
오랜 숙고 끝에 골라낸 첫 번째 책 《열두 살 192센티》
이제 1차 리스트 중에서 우선 7권을 골라내기로 했다. 퍼블릭 도메인과 저작권 계약이 필요한 책들의 비율은 반반 정도를 생각했다. 이들 중 시리즈의 첫 권이 담겨야 할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왔다. 홍 위원이 괜찮은 성장소설 작가 조앤 바우어를 추천해 주었고, 작품 몇 개를 골라 한국어판 판권을 문의했더니 1권만 팔리고 3권의 판권이 살아 있었다. 그중 홍 위원이 추천한 책은 리뷰를 의뢰했고 다른 한 권을 받아서 내부에서 검토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골라낸 책이 레인보우 북클럽 시리즈의 1권 《열두 살 192센티》(조앤 바우어)였다. 부모의 이혼과 재능에 대한 고민으로 갈등하던 열두 살 키다리 소년 ‘트리’가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히 성장하는 모습을 유쾌하면서도 가슴 찡하게 그려 낸 성장 소설이다. 서평으로 유명한 커커스 리뷰는 이 책의 추천사에서 이렇게 썼다. “조앤 바우어는 일상의 삶에서 영감을 얻고 성과를 찾아내는 거장이다. 그녀는 인생의 심각한 주제들을 경쾌한 웃음과 우아한 글 솜씨, 그리고 깊은 지혜를 통해 멋지게 풀어낸다.”
번역이 다 된 뒤에도 공들여 문장을 다듬고 편집했다. 이 책의 원문이 주는 톡톡 튀는 느낌을 최대한 살리고 싶었다. 책 내용에 어울리는 발랄한 표지 삽화를 그렸고, 본문에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풀컷을 넣은 다른 책과 달리 귀여운 소품 같은 삽화를 적절히 나눠서 배치했다. 핵심독자가 초등 5~6학년임을 감안하여 독서지도를 하는 선생님들께 원고를 받아서 본문 마지막에 작품 해설도 넣었다.
내가 찾아낸 보물들을 돌아보며
시리즈 론칭은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특히 1권 《열두 살 192센티》 는 출간 이후 <조선일보>를 비롯해 여러 언론에서 미디어 서평을 받았으며 아침독서신문의 추천도서로 선정되었다. 이 책은 출간 후 1년간 1만부 가까이 팔렸고 이후에도 꾸준히 팔려 외서 계약을 이어나가며 지금도 판매되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오랜만에 시리즈를 살펴보니 절반 정도는 절판되거나 품절되었지만 저작권 계약을 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팔리고 있는 타이틀이 있어서 놀랍고 흐뭇하다. 출판계에 있는 분들은 알겠지만 외서는 계약기간이 끝나면 재계약을 하고 선인세를 다시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판매가 담보되지 않으면 재계약을 할 수가 없다. 아직까지 절판이나 품절이 아니라는 것은 재계약을 해서 기간을 연장했고 그만큼 꾸준히 판매되어 왔다는 방증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좋은 문학작품을 읽히고 싶다는 내 바람과 어린이 문학 시리즈를 내고 싶다는 회사의 사업계획이 맞아 떨어져서 출간되었던 레인보우북클럽 시리즈. 나름대로 엄선했고 시장의 좋은 평가를 받은 책도 있지만 아쉬운 책들도 있다. 영업의 편이성을 위해 초등 5~6학년 대상으로 아동 시장에 론칭했지만 사실은 중학생 이상이 읽기에 적합한 책들이 더 많다. 론칭 준비에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해 시장에서 알려진 시리즈가 되지 못한 것은 그 탓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팝송에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랑받는 명곡이 있듯이 성장소설 중에도 오래도록 사랑받는 작품들이 있다. 나는 이런 것을 ‘올디스 벗 구디스(Oldies but Goodies)’라고 부른다. 《열두 살 192센티》 《릴라가 꿈꾸는 세상》 《불타는 애시로드》 내가 찾아낸 보물들을 여러분과 청소년들에게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