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파리 시간으로 7일 20시 45분
한국에서의 마지막 여행지는 전주였다. 전주국제영화제. 전주영화제에 처음 간 것은 2017년이었다. 전주국제영화제는 매년 5월 초에 어린이날을 즈음하여 열린다. 2017년은 내가 실로 영화에 푹 빠져있던 해였다. 그 해에만 224편의 영화를 봤었다. 그 전까지는 영화에 특별히 관심이 없었다. 내 아버지는 프로 수준의 영화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난 빔프로젝터나 돌비 디지털 5.1 서라운드 스피커, 스타워즈 전편 DVD 같은 게 원래 집집마다 다 있는 건 줄 알았다. 그 홈시어터로 우리 가족은 밤마다 영화를 봤고, 내게 영화란 아빠가 허구헌날 보여주는 것, 내지는 남자친구와 데이트할 때 종종 보는 것 이상의 무엇도 아니었다. 내가 관심 있던 건 활자로 된 이야기뿐이었다. 같은 서사 장르의 예술이지만 영화에서는 전혀 특별한 매력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내가 영화에 빠져들게 된 계기는 다소 구체적인데, 바로 <올드보이> 때문이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 캠퍼스 바로 앞에는 큰 CGV가 있었다. 그래서 가끔 동기들과 그곳에서 영화를 보곤 했는데, 어느 날 <올드보이>가 개봉 10주년을 맞이해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을 한다는 거였다. 워낙 유명한 작품인데 좋은 기회다 싶어 수업이 끝나고 보러 갔었다. 그리고 바로 그 날부터 매일 밤마다 한국영화를 한 편씩 보고 잠자리에 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영화에 대한 관심을 키워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화제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부산보다 부담 없는 전주에 당일치기로 처음 다녀왔다. 영화제란 말 그대로 ‘영화 축제’로, 대체로 아직 개봉을 하지 않은 여러 영화들의 출품을 받아 영화제 기간 동안 상영을 하고, 경쟁 부문이라면 심사를 통해 시상을 하기도 한다. 가령 전주에서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면 전주 시내의 여러 영화관들(CGV 같은 멀티플렉스부터 작은 로컬 영화관, 또는 때에 따라 영화제 측에서 야외에 임시 상영관을 설치하기도 한다)에서 시간표에 따라 영화들을 상영하고, 관객들은 평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듯이 티켓을 예매해서 영화를 보면 되는 것이다. 다만 ‘영화제’이니만큼 축제다운 특별한 요소들도 많이 있는데, 우선 개·폐막식이 있고, 감독이나 배우들이 관객과 대화하는 시간(GV: Guest Visit)을 갖기도 하고, 장소에 따라 공연이나 전시를 하기도 하고, 로컬 식당이나 카페, 관광지 등과의 제휴를 통해 방문 행사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영화제의 꽃은 영화다. 영화제마다 컨셉과 특색이 있게 마련인데, 개인적으로는 전주국제영화제의 프로그래머 분들을 상당히 신뢰하는 편이다. 국제영화제이니만큼 다양한 국적의 다양한 영화들이 상영되는데, 정말 대체로 관람을 후회할 일 없는 우수한 작품들이다. 이렇게 아직 국내에서 개봉한 적 없는, 심지어 극장 개봉 때가 되면 영화제 출품 당시와는 약간 다르게 편집상의 수정을 거치기도 하는 따끈따끈하고 신선한 작품들을 미리 만나고, 때로 추후에 이때 본 영화의 정식 개봉 소식이나 수상 소식을 접하게 되는 일은 정말 즐겁다. 심지어 코로나 때문에 영화제의 정상 개최 소식이 만우절 거짓말과 같이 느껴지던 작년 평창국제영화제의 경우, 평일에 갔더니 영화제가 너무도 한산해서 참석하는 GV마다 모든 감독, 배우들과 기념촬영은 물론 편하게 대화도 하고 친구에게 보내줄 영상편지까지 부탁드렸던 바 있다. 이때 이렇게 접했던 작품들은 작년과 올해에 걸쳐 모두 무사히 정식 개봉을 했고, 어떤 영화는 높은 평가를 받거나 수상을 하는 등 좋은 소식이 계속 전해져 마치 영화제가 끝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오늘, 바로 이번 달에 이곳 파리에서 ‘파리한국영화제’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기쁨의 탄성을 내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니. 지금까지 해마다 개최돼온 영화제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정확한 날짜와 상영되는 작품들의 목록을 눈으로 보니 이루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이었다. 파리 한복판에서, 말 그대로 ‘한국영화’들이 줄줄이 상영되는 것이다. 아마 특별한 행사 없이 조용히 이어지는 상영회에 가까울 것으로 예상되지만, 파리 중심에 위치한 영화관에서 한국 사람들이 만든 한국어로 된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을 촌스러우리만치 자꾸 상상하는 일을 도통 멈추기가 어렵다. 눈치 챘겠지만 내가 영화 얘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다. 출국 전 전주에 다녀온 이야기를 쓰려던 거였는데, 시작도 못하고 여기까지 와버렸다. 오늘의 주제는 내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