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제영화제 2) 2021년 6월 파리 시간으로 8일 23시 13분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곧장 숙소로 향했다. 짐을 맡긴 뒤 택시를 타고 이동해 첫 번째 영화를 관람했다. 20년 넘게 장애인 시설에서 생활하다 자립한 박동수 씨의 일상과 이야기를 담은 류형석 감독의 다큐멘터리 <코리도라스>였다. 장애인이 비장애인의 돌봄과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동등한 사회적 주체임을 강조하며 장애인권 수호를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여러 매체들을 통해 부쩍 들려오고 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을 포함해 보다 광범위한 대상의 권리를 외치는 ‘에코페미니즘’이 번지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환경문제, 동물권, 장애인권 등의 이슈들이 많은 창작자들에 의해 다루어지고 있다.
내가 특히 장애인권문제에 제대로 눈을 뜨게 된 건 김초엽, 정원영의 <사이보그가 되다>를 읽으면서부터였다. 부끄럽지만 ‘장애학’의 존재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장애학이란, 장애인의 ‘장애’가 이들 각자가 갖고 있는 신체적, 혹은 정신적 결함이 아니라 그러한 ‘다름’을 ‘결핍’이자 ‘장애’로 규정하는 사회의 시선과 배제가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정의를 기본으로 하는 학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나와는 달리 갈색 머리카락을 갖고 있는 것, 긍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어떤 구별되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들을 모두 ‘장애인’으로 규정하는 일은 없지만, 특정한 차이점들에 있어서는 그것들을 ‘장애’라고 규정하고 이와 같은 차이를 지닌 이들을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으로 대하곤 하는데, 이처럼 장애인이란 그 자신이 존재할 때는 그저 그로서 존재할 따름이지만, 사회가 그를 ‘장애인’의 범주로 분류하는 순간 비로소 ‘장애인’이 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내용에 관해서는 물론 많은 이야기가 오갈 수 있겠지만, 어쨌든 ‘장애인은 어떻게 정의되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그저 한 번이라도 가져보는 것 자체가 이 문제에서는 가장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 대한 자세한 감상은 다른 지면을 통해 적어야 할 것 같지만, 아무쪼록 상술한 문제에 정확히 부합하는 시선을 담은 훌륭한 다큐멘터리였다. 주지하다시피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극영화에 비해 그리 인기가 있는 편은 아니다. 극적인 연출 없이 사실만을 담았다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진지하고 심각하고 지루하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사예술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다큐멘터리야말로 궁극의 장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인생을 곧이곧대로 촬영한 영상을 있는 그대로 접할 때의 느낌은 상당히 생경하다. 나도 모르게 극영화를 보고 있는 걸로 착각하고 속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영화보다 재미있고 영화보다 믿기 어렵고 영화보다 참혹하고 영화보다 아름다운 일들이 실제 삶에서 숱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꾸며내고 연출해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을 오히려 다큐멘터리에서는 볼 수 있다. <코리도라스>는 그와 같은 오리지낼리티가 눈부시게 빛나는 작품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점심때였다. 띄엄띄엄 말을 골라가며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나누면서 영화관 근처의 수제버거 집에서 햄버거를 먹었다. 원래 가려던 다른 가게가 문을 닫아 어쩔 수 없이 들어간 곳이었는데,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입안에 침이 고일 정도로 재료가 신선하고 맛있는 버거였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후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있었다.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 우리는 전동킥보드와 자전거를 타고 한옥마을로 향했다.
(전주 이야기는 길어지는데 사진은 부족하므로 이번에는 그냥 오늘 만난 귀염둥이 사진을 하나 첨부한다.
마트 앞인데 잘 보면 유리에 '함께 온 동물은 여기서 기다리게 하라'고 적혀있다.)